미국 생활

청설모와 맞짱을 뜨고 나서

삼척감자 2023. 9. 26. 04:41

우리 집 주위에서 청설모는 가장 흔히 눈에 띄는 동물이다. 가을이 깊어져 가니 창문을 열면 땅을 파고 도토리를 숨기는 청설모를 거의 언제나 볼 수 있다. 청설모가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이리로 몇 걸음 저리로 몇 걸음, 마치 경주라도 하듯이 빨리 내달리지만, 몇 걸음 가다가 바로 멈추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재주 넘기를 하는 걸 보면 보이지 않는 관중을 의식하는 것 같아서 이놈은 자신을 인기 있는 댄서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날개가 없는데도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를 타고 거침없이 오르내리거나 나무에서 나무로 재빨리 이동할 때는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청설모를 악마와 연관 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청설모를 요괴로 여기기도 했고, 서양의 민간신앙에서는 청설모가 지하 세계와 관련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청설모를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사람에게 친근한 동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청설모를 자주 가까이서 보게 되는 내게 청설모는 거의 몸집만큼이나 큰 꼬리 때문에 귀여워 보이기는 하나 얼굴은 쥐와 거의 같아 보이고, 인간과 가까이에서 살지만, 인간을 거의 무시하는 짐승처럼 보인다. 얼굴이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아도 그놈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할 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럴 때의 얼굴을 보면 성화에서 보이는 악마의 얼굴처럼 교활하게 보여서 징그럽기까지 하다.

 

며칠 전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우리 집 문 바로 옆 쇠 울타리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청설모를 보았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놈! 화단 망치려고 들어오는 거지. 얼른 나가거라.”라며 늘 갖고 다니는 목발로 밀었더니 달아나기는커녕 울타리를 네 다리로 꽉 잡고 버티는 게 아닌가. 울타리에서 떼어내려고 목발로 세게 밀었더니 바로 내 목발을 네 발로 꼭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 목발을 흔들어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고 찍찍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게 여차하면 덤빌 것만 같았다. 한참 노려보며 목발을 열심히 흔들었더니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놈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사생결단하고 덤빌 기세다. 목발을 휘둘러도 꼼짝하지 않기에 드디어 내가 포기했다. “가건 말건 네 마음대로 해라.” 그놈이 보기에는 끔찍한 흉기를 휘두르며 덤비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상대하는 게 목숨이 달린 일인데, 나는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오늘 아침에 블라인드를 열자, 창밖으로 땅을 열심히 파는 청설모가 보였다. 아마도 겨울 양식으로 쓸 도토리를 묻는 것 같았다. 연신 꼬리를 나풀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놈을 보니 귀엽다는 생각에 앞서 며칠 전 나와 맞짱을 뜨겠다던 성질이 매우 모질고 사나워 보이던 놈이 떠올랐다. 당분간은 청설모를 볼 때마다 귀여운 꼬리보다는 이빨을 드러내며 성깔을 부리던 입으로 내 눈이 먼저 갈 것 같다.

 

멀리서 볼 때는 귀엽게만 보이던 청설모도 가까이서 자주 보니 쥐처럼 생겼느니, 악마의 얼굴이니, 성깔 있느니……하며 나쁜 점을 들추게 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이기에 아무리 친한 벗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가 보다. 좀 거리를 두고 볼 때는 괜찮아 보이던 벗도 너무 가까이하다 보면 서로의 잘못이 보이고 다투거나 싫어지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이겠다. ‘탈무드에서는 친구는 석탄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친구는 불타고 있는 석탄과 같아서 적당한 거리에서는 몸을 따뜻하게 해 주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몸을 데게 한다. 청설모를 보고 이런 말씀을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202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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