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뉴저지 주택국을 통해 은퇴 후에 살 집을 알아보고 있던 어느 날 말보로(Marlboro)에 적당한 집이 나왔으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말보로? 그 동네가 뉴저지주 중부 지역 어디에 있는 것 같은데…..지도로 찾아보니 한인 타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범죄율이 낮고, 공기가 맑고 게다가 바다도 가까운 게 주거 환경으로 나무랄 데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뉴저지주 동북부 지역에 살던 나는 뉴저지 중부 지역에 있은 작은 마을인 말보로(Marlboro)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오래전 그 동네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소문(교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함)을 얼핏 듣고는 말보로 담배가 연상되어 담배 농장과 담배 생산 공장이 그 마을에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뉴저지 중부 교외 지역에 있는 Marlboro는 녹지대가 많고,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Marlboro라는 동네 이름은 1768년에 이 마을 동부에 Marl(=이회토, 泥灰土)이 대량으로 발견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회토는 석회암이 풍부한 점토 토양인데, 이 토양은 물을 잘 머금고, 배수가 잘되며, 산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어서 피노 누아와 같은 품종의 포도 재배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회토는 뉴저지주가 바다로 덮여 있던 선사시대에 존재하던 물고기, 조개 등 바다 생물의 잔해로 생성된 진흙인데 공장에서 화학 비료가 대량 생산되기 전에는 이 흙이 비료 대신 사용되어 뉴저지주는 물론 뉴욕주에서도 이 흙을 대량으로 사서 농작물 경작지에 뿌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마을 이름이 이 진흙의 이름인 Marl에 마을이라는 단어 Boro(또는 Borough)가 합성되어 Marlboro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필립 모리스 회사에서 담배 이름으로 왜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사용했을까?
몇 개의 가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동네 이름과 담배 이름에는 연관성은 없다. 다만 남성 흡연자들을 겨냥하여 말보로라는 이름이 발음상 강한 느낌을 주기에 남자다움을 강조하려고 이 이름을 지었을 거라는 설명이 그럴싸하다.
오래전 잡지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카우보이 복장을 한 남자가 담배 피우는 모습 밑에 답뱃갑을 배치했고, 담뱃갑 위는 빨간색, 아래는 하얀색으로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그 중간에 배치한 회사 로고 밑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했다는 “VENI-VIDI-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적어서 사나이 가는 길에 거침이 없음을 나타낸 게 인상적이다. 위에 빨간색을 칠한 건 Marlboro라는 단어가 미국 원주민(아메리칸 인디언) 어느 부족의 말로서 “붉은 흙으로 덮인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거라는 해석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이다.
지금 말보로는 40% 정도는 녹지대이며 나머지 땅은 포장도로와 주택지라서 이름도 낯선 이회토는 구경도 할 수 없다. 물론 담배 농장이나 공장, 그런 건 애당초 없었고 지금도 없다. 혹시 ‘말 보러’ 올 분이 있다면 다른 데 가서 알아 보셔.
(2023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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