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

내 신앙생활의 종착지, 이튼타운 성당

삼척감자 2024. 2. 27. 22:55

얼마 전 초등학교 때 친구인 미카엘에게서 천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참 슬펐다. 그는 어릴 적에 강천규라는 이름보다는 강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 신앙심이 깊은 친구였다. 어릴 적에 내 고향인 삼척 성내동 성당에서 여성 전교() 회장으로 활동하던 어머니와 함께 성당 구내의 작은 집에 살던 그는 아버지가 한국동란 중에 납치되어 실종된 후 홀로 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기에 늘 외로움을 탔다.

 

그 옆집에는 역시 아버지가 남성 전교 회장으로 활동하던 민 안드레아 가족이 살았는데, 8남매의 장남인 그는 어릴 적에 사제가 되는 게 꿈이었다. 방과 후에 가끔 그 두 친구를 만나러 가서 놀던 성당 앞마당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가끔 사제관 앞뜰을 힐끔거리며 훔쳐보면 늘 미소를 머금은 서양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야외 식탁에서 간식을 드시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분들은 왜 애란(아일랜드)이라는 먼 나라에서 한국으로 와서 결혼도 안 하고 사는지, 무슨 음식을 드시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물어 볼 수 없었다.

 

강 안드레아 어머니의 권유로 세례받게 된 어머니를 따라 우리 6남매도 하나둘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고, 나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끔 주일 미사에 참례하며 강 안드레아의 어머니에게 세례받을 준비를 하라는 압력을 받던 어느 날 주일 미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키 크고, 눈동자가 새파란 아일랜드 태생 수녀님에게 그 전 주일 미사를 빼먹었다고 심하게 야단맞은 후로는 성당에 발을 끊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 서울 변두리 동네에서 우연히 같은 고향 출신의 말가리다 아주머니를 만난 게 성당에 다시 나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분이 레지오 단원인 할머니 두 분을 우리 집에 보냈는데, 어머니가 오랜 냉담을 풀고, 내가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하고 나서야 그분들의 방문이 중단되었으니, 레지오 단원이 참으로 끈질기다는 걸 일찍 실감했다.  

 

영세한 다음 날부터 직장에 입사하고 얼마 후 가톨릭 신자인 아내를 만나 몇 년 후 회사 근처의 명동성당에서 혼배성사를 받고, 그다음 해에 승진하면서 오랜 냉담이 시작되었다. 일 년 내내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어볼 수 없던 부서라서 주일에도 근무했기에 성당에 나갈 수 없기도 했지만, 늘 긴자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업무때문에 중압감에 몸과 마음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미국 주재원으로 파견되어 뉴저지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하고도 한동안은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에 바쁘기도 했지만, 주말이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미국 생활을 즐기기에 바빠서 성당에 나가는 시간을 낼 수도 없었고, 계속된 냉담으로 신앙에 대한 갈망도 옅어졌다.       

 

그러나 이웃에 살던 한인 공동체 신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주님은 우리 가족을 오렌지 성당으로 이끄시어 오랫동안 거기서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셨다. 오렌지 성당에 다니는 중간에 회사 명령에 따라 전근되어 3년 가까이 살게 된 앨라배마 헌츠빌 성당의 신자 수는 거의 3,000명이었다. 남침례교의 교세가 막강한 남부 소도시에 그렇게 큰 가톨릭 공동체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미사 중 (미국인) 신부님이 강론할 때는 으레 눈을 감고 잠깐 잠을 청하곤 했으니 은혜로운 말씀은 대부분 놓쳐 버렸지만, 80명 정도 되는 한인 신자들과의 교류가 즐거웠고, 우리 두 딸이 세례받은 본당이니 우리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성당이다.

 

40년 가까이 몸담았던 메이플우드 성당(오렌지에서 이전함)에서 이튼타운 성당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동네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이튼타운은 머나먼 앨라배마처럼 멀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고작 한 시간 조금 못 걸리는 거리에 있는 동네인데도 그랬다. 이사하고도 오랜 세월 정들었던 성당을 떠나기가 아쉬워서 주일 아침이면 멀리 떨어진 성당으로 자동적으로 마음이 먼저 떠나고 몸이 뒤따랐다. 먼 길 가기가 힘들다 생각되면 가끔은 집 근처에 있는 미국 성당에서 미사 참례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이방인이 된 느낌은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코비드 19 팬데믹으로 대면 미사가 중단되고 나서는 유튜브로 중계되는 영상 미사로 마음을 달래던 짧지 않은 기간이 끝나고 대면 미사가 재개되었다. 그동안 편히 지낸 탓인지 먼 거리를 달려서 메이플우드 성당에 가는 게 망설여졌다. 가까운 거리에 한인 공동체가 있는데도 멀리 떨어진 공동체로 가야 하나? 가톨릭은 속지주의가 원칙이니 가까운 성당에 마땅히 등록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고 어느 평일에 사전 답사를 위해 이튼타운 성당을 찾았더니 성당 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사제관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었다. 성당 주위를 둘러보니 건물과 주변이 초라해 보여서 기껏 마음먹고 성당을 찾았는데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이 성당에 등록해야 하나? 그렇게 망설이다가 그 주일부터 이튼타운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시작했지만, 어느 성당에서나 그렇듯이 새로 옮긴 성당에 적응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3년이 훌쩍 지나서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거쳐온 성당 어디서나 주님은 함께 하셨음을 느끼며 다음 성경 구절을 묵상하게 된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시편 139, 7~10)

 

   한국동란 직후에 내 고향 성당의 본당신부로 계셨던 고가비노 신부님은 가난과 진료 시설 부족으로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국인 아일랜드에서 모금하여(자신이 상속받은 유산을 대부분 기부했다는 소문도 있었음) 당시로는 최신식 병원인 성요셉 병원을 지어 기부하셨다. 10년쯤 전에 고향 후배를 통해 고국인 아일랜드에서 그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앨라배마 헌츠빌 성당의 본당신부였던 그레인저 신부님은 온몸으로 번진 암으로 고통받으시면서도 곧 아버지 집으로 갈 걸 생각하면 행복하다.’면서 신자들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성가를 부르시곤 했다. 우리가 헌츠빌을 떠나고 바로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저지 한인 공동체의 초석이 되신 박어거스틴 몬시뇰님은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않은 거목이었다. 몇 년 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직도 많은 교우가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다. 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도 여러 번 방문하여 기도해 주셨는데 어느날 스테파노 씨, 특히 죄 많은 신부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주세요.”고 부탁하신 일이 기억에 남는다. 하필이면 신앙심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인간에게 그런 부탁을 하셨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여러 성당을 거치며, 여러 신부님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이튼타운 성당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적지 않은 나이에 더는 떠날 일이 없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신앙 여정에서 오르막길, 내리막길 그리고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 숨었다고 생각한 냉담 기간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다음 구절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참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제 더는 방황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내 신앙생활의 종착지인 이튼타운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를 수 있게 되기만 바랄 뿐이다.

 

내가 가까운 곳의 하느님이기만 하고 먼 곳의 하느님은 아닌 줄 아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는다고 내가 그를 보지 못할 줄 아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 23, 23~24)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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