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쟈니와 빌

삼척감자 2024. 5. 5. 06:13
오전이고 오후고 언제나 집 둘레길에서 눈에 띄는 호리호리한 동양인이 있다.
깔끔한 외모에 무표정한 얼굴, 남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옷차림이라서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던 그를 본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저께 처음으로 서로 통성명을 했다.
 
어쩌다 딱 맞닥뜨리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쟈니라고 합니다. 중국 태생의 은퇴 목사로서, 나이는 69세입니다. 아내의 이름은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당신 아내의 이름은 데레사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억양 없이 숨 가쁘게 말을 쏟아내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니. “서부 영화 Johnny Guitar에 나오는 주인공 쟈니 말인가요?” 그러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 다들 내 이름만 대면 서부 영화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소. 난 그 영화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는데” 이 양반 혹시 로봇이 아닐까? 등 뒤에 배터리를 장착했는지 확인해 볼 걸 그랬나?
 
오후에 산책하다가 어떤 뚱뚱한 여자가 “안녕하세요. 나는 빌의 안사람 됩니다.”라며 말을 걸어왔다 “어떤 빌 말인가요? 우리 콘도미니엄 단지에 빌이 두 사람 있던데.” “핸디맨(Handyman) 빌입니다.” 마침 우리 마님이 걸어오기에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하고 나는 그 자리를 떴다. 핸디맨 빌이 홀아비로 알고 있었는데, 멀쩡한 마누라가 있었다니. 그가 아내의 존재에 대해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공연히 배신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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