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딸들 생일에 즈음하여

삼척감자 2022. 9. 3. 07:14

며칠 전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작은딸이 마흔 번째 생일을 맞았기에 축하 전화를 했다. 40세나 되었건만 아직도 나는 전화할 때 가끔 우리 예쁜 딸이라고 부른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사는 게 우울해도 딸들의 전화를 받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외손녀나 외손자와 함께 딸들과 화상통화라도 한 날은 술 한잔 걸치지 않아도 행복하다.

 

아들이 없는 나는 아들과 딸을 대할 때 아버지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없지만, “딸을 가진 아버지는 (무엇이든 들어줘야 하는) 딸의 인질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아들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거칠게 말하고 화를 내다가도, 딸이 아버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아빠, 부탁이 있어요라고 말하면 뜨거운 프라인 팬에서 버터가 녹듯이 마음이 풀어져 버린다.”라고 한 개리슨 케일로라는 사람의 말이 맞을 거로 짐작한다. 더구나 나처럼 멋대가리 없고 무뚝뚝한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표정이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며칠 후에는 큰딸이 마흔두 번째 생일을 맞게 된다. 딸들이 어렸을 적에는 화려한 포장을 한 선물도 준비하고 가끔은 요란한 이벤트도 준비하고, 카드에 한글로 또박또박 쓴 축하 메시지도 준비하였지만, 이제는 인터넷으로 선물을 보내고 영문 메시지가 담긴 전자카드를 보내니 간편하기는 하지만, 설렘은 덜하다. 딸들이 그 나이 되도록 나는 아들이 없음을 아쉬워한 적은 없다. 딸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내가 그럴 까닭이 없다.

 

그런데 딸들이 결혼할 때마다 좀 억울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짐 비숍이라는 사람은 딸들이 결혼할 때마다, 나는 백만 달러짜리 명품 악기를 고릴라에게 주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라고 말했는데, 딸들 시집 보내는 내 기분이 딱 그랬다. ‘나도 고릴라 같은 아들이 있었더라면 명품 악기를 얻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잠깐, 세월이 흘러 어느덧 고릴라 같던 사위들도 딸들 가정을 지키는 듬직한 울타리가 되었다.

 

딸들을 낳기 전에 나는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가 70년 전이었고, 자랄 때의 사회 분위기나 가정 교육 때문에 그랬던 거니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에도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에페 5, 23~24)”라고 나오는 거로 보아 남존여비가 오래된 사회 규범이려니 생각했다.

 

오래전 가족계획의 구호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는데, 나는 어쩌다 보니 딸 아들 구별 말고 딸만 낳아 잘 길렀으니 당시의 정부 시책에 충실히 잘 따른 셈이다. 그런데 아들 없이 딸만 둘을 낳아 기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성의 자유와 권리의 확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딸들이 남자 아이들처럼 자라기를 바란 건 아니고, 다만 딸들이 남자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4년 전 대통령 선거 때는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딸들, 특히 큰딸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힐러리 클린턴에게 표를 던졌다. 우리 부부가 힐러리에게 한 표씩 던졌는데도 그녀는 낙선하고 우리 큰딸은 낙담하여 사흘이나 울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는 마음이 아팠다.

 

두 딸 모두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 나에게 외손녀 둘과 외손자 둘이 생겼다. 직접 길러야 하는 딸들과는 달리 딸들 부부가 길러주는 외손들은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존재이다. 손자와 손녀에 대해 말한 다음 글들을 보니 좀 과장된 표현은 있어도 공감하지 못할 말은 없다.

손자, 손녀가 태어날 때까지는 완전한 사랑이란 오지 않을 수 있다.” –웨일스 격언

손자, 손녀는 세상을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친밀하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격언

손자, 손녀는 꽃과 같아서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다.”-격언

손자, 손녀는 당신이 몰랐던 공허한 가슴을 채워 준다.” –격언

자녀를 낳지 말라. 손자, 손녀만 낳아라.” –고어 비달

손자, 손녀가 이렇게 예쁜 줄 알았더라면 아들, 딸보다 먼저 그들을 낳았을 거다.”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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