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유언장을 작성하다

삼척감자 2022. 9. 6. 03:11

코로나바이러스로 자가 격리가 시작되고 미국 내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들으며 진작에 유언장을 만들어 둘 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에 교통사고라는 날벼락을 맞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나는 죽음이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누구든 죽는다는 사실을 절감했기에 유언장을 미리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었고, 변호사인 큰딸도 몇 년 전부터 유언장을 미리 만들어 두자고 권하며 유언장 전문 변호사까지 알아 두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몇 년을 끌다가 이번에 마음이 바빠진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여러 차례 유언장 내용에 대하여 큰딸을 비롯한 가족들과 다음과 같이 의견을 교환해 두었다.

 

1. 장례는 매장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화장으로 할 것인가?

본인의 신앙이나 인생관에 따라 선택하면 되겠다. 나는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결정을

했지만, 그 결정이 어떤 건지는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운전면허증 뒤에 장기 기증 의사가 있다고 표시해 두기는 했지만, 사고로 몸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서, 더구나 오래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장기가 많이 손상되어서 별로 기증할만한 장기가 없다고 하니 내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2. 회생 가능성이 없어도 연명치료를 계속 받을 것인가?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지만, 미리 유언장에 밝혀 두면 가족이 그 내용에 따라 결정을 내리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고, 치료 중단에 따른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는 나이가 예순도 되지 않았으니 연명 치료를 통해 운 좋게 살아날 수 있었으나 이제 나이 일흔이 넘었으니 무의미한 연명보다는 품위 있게 죽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3. 유산 분배 비율은 어떻게 하면 될까?

이 문제는 엄마 아빠에겐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잖아라는 큰딸의 한마디에 고심할 것도 없이 간단히 정리되었다. 보잘것없는 유산이지만, 우리 부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는 큰딸과 작은딸에게 반씩 분배하기로 했다. 유산이 보잘것없다는 건 딸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유산 분배를 두고 딸들끼리 싸울 일이 없으니 어쩌면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런 내용을 진작에 문서로 작성하고, 당사자와 증인의 서명을 받아 공증까지 마쳤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하던 참에 큰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언장 전체를 본인이 직접 쓰고, 날짜 표시와 서명을 하고 부부가 각각 서로의 증인이 된다면 증인 입회 및 서명 그리고 공증 등의 절차를 밟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유효하다고는 했다. 변호사인 큰딸의 말이니 믿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미국 내 대다수의 주에서는 자필 유언장을 인정해 주는데 내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도 그런 주에 속했다.

 

큰딸이 작성해준 유언장 두 벌(아내와 나)을 이메일로 보냈기에 확인해 보니 각각 40쪽 분량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고 며칠 후에 쓰기 시작해서 한 달 조금 더 걸려서 모두 마쳤다. 영문으로, 그것도 의미를 잘 모르는 법률 용어가 많이 섞인 문서를 베껴 쓰기란 재미가 없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유산 목록을 작성해보니 동산과 부동산 모두 합쳐도 한 쪽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필사를 마친 후 모두 80쪽 정도 되는 문서를 모두 스캔해서 큰딸과 작은딸에게 보내주고 원본은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는데, 그 위치는 사진으로 찍어서 별도로 두 딸에게 보내 주었다. 이걸로도 법적인 유언장이 될 수 있지만, 나중에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세가 꺾여서 일상이 정상화하면 유언장 전문 변호사를 선임하여, 증인과 함께 변호사 앞에서 서명하고 공증을 받아 제대로 된 유언장을 다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사후에 남은 가족이 이것저것 정리하기 편하게 사회보장국(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은행, 크레딧 카드, 보험, 자동차, 집 관련 문서, 그리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이메일을 비롯한 인터넷 계좌의 주소, 아이디 그리고 패스워드를 모두 엑셀로 정리하여 유언장 원본과 함께 두었다.

 

이렇게 해서 적지 않은 수고를 한 끝에 직접 손으로 쓴 유언장을 만들었지만, 가슴으로 쓴 유언장이 아니라 머리로 쓴 유언장이라서 그런지 비장한 마음은 들지 않고, 골치 아픈 사무적인 일 처리를 마친 것처럼 후련하기만 했다. 이렇게 준비해 두었으니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가족이 뒷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미리 문서를 만들어 두기 잘한 것 같다.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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