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야간 비행기 여행(Red-Eye Flight)

삼척감자 2022. 9. 5. 02:09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작은딸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 며칠 후에 한국어 자막이 있는 미국 영화를 감상했다. 대체로 번역이 매끄러워서 자막이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는데, 다음 대사의 번역이 옥에 티였다. 사전만 찾아보았어도 이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서둘러 번역하다 보니 그랬나 보다.

   Dad, I'm taking the red-eye. It's the last flight out. It's gonna be way too late.” 

   “아빠, 제 눈이 충혈되어 버렸어요. 마지막 비행기에요너무 늦을 거예요.”

   이 번역은 다음과 같이 정정되어야 한다.

   “아빠저 야간 비행기 타잖아요마지막 비행기에요너무 늦을 거예요.”

 

red-eye flight’ 또는 줄여서 ‘red-eye’는 비행기 여행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다. 저녁이나 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오전(대개는 아침에) 도착하는 야간비행을 뜻한다. 출발하고 좀 지나면 잠잘 시간이 된다. 대부분의 야간비행은 대개 오후 9시 지나서 출발해서 다음 날 아침 5-6시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red-eye(충혈된 눈)’라는 용어는 목적지에서 내려야 하는 승객들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야간 비행기에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승객들의 눈은 피로하고 건조해서 충혈되기 쉬운 데서 이런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야간비행은 꽤 흔한 편이지만, 비행기 노선마다 운행하지는 않는다. 가장 흔한 야간비행은 서부에서 동부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이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행 노선 또는 뉴욕에서 유럽행 노선 같은 거다. 야간비행은 보통 최소 네 시간에서 대여섯 시간 남짓 걸린다. 

 

야간비행에서는 잠을 놓치거나 설치기 쉬우므로 여행객들이 회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름대로 이점도 적지 않다. (여행 안내문에서 발췌 번역함)

1. 주간비행에 비해 비행기 요금이 매우 싼 편이다.

2. 야간에는 공항이 덜 붐비므로 보안 검색이나 탑승 수속에 시간이 덜 걸린다.

3. 만석이 아니어서 옆자리가 빌 때도 있어서 편안한 여행을 즐길 가능성이 높다.

4. 주간비행에 비해 덜 시끄럽다. 주간 비행에서 흔히 보게 되는 우는 아이, 술 취하여 떠드는 승객이 거의 없다.

5. 짐가방을 빨리 찾을 수 있다.

6. 목적지에 도착하고 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7. 교통이 혼잡하지 않을 때 목적지에 도착하여 교통편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8. 야간에는 비행기 운행이 줄어드니, 대개는 정시 출발과 도착을 기대할 수 있다.

9. 정상적인 식사 시간을 맞출 수 있으므로 식욕을 잃지 않게 된다.

10. 탑승객이 적으므로 보안 검색원의 실수가 적어서 휴대품 분실 사고가 줄어든다.

 

성격이 예민한 편이라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도 뉴저지-로스엔젤레스 간의 왕복 여행 계획을 때, 때는 딸이 공항에 나오기 편한 시간에 도착하고, 돌아올 때는

딸이 공항에 데려다 주기 편한 시간으로 비행기 편을 선택하다 보니 야간비행이 포함되었다. 이용해 보니 위에서 나열한 야간비행의 이점에 거의 공감하게 되었다. 특히, 요금이 매우 싼 게 마음에 들었다. 수입이 없는 은퇴자가 여행 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는데, 잠 좀 설치는 게 그리 문제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을 맞아 귀향하게 되면 저녁에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여 열두 시간을 밤새 달려서 다음 날 새벽에 고향인 삼척 도경리역에 도착했다. 좌석이 모자라 복도까지 가득한 승객들, 손수레를 밀며 주전부리를 파는 강생회 직원들, 싸움도 심심찮게 벌이는 취객들로 귀향 전쟁은 늘 끔찍했지만, 지나고 보니 야간 기차 여행은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는 낭만이 있었다. 

 

이번 야간비행에서는 창가에 앉았기에 어두움에서 빛으로 바뀌는 세상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묵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마침 부활절을 얼마 앞둔 때였다. 비행기 날개 위아래로 보이는 동트는 세상은 무척 아름다웠고, 날개 밑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보석 같았다. 마치 생텍쥐베리의 소설 ‘야간비행’에 나오는 다음 구절처럼.

   “‘너무나 아름답군.’ 파비앵은 생각했다. 그는 보석처럼 빼곡히 들어찬 별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파비앵과 그의 동료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없는 세계에서, 그들은 보석이 가득한 방에 갇혀 다시는 그 방을 나올 수 없는, 동화 속 도시의 도둑들 같았다. 그들은 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이는 보석들 가운데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

 

(20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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