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유카탄반도에 다녀와서

삼척감자 2022. 9. 6. 03:16

지난해 연말에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북동쪽 끝에 있는 휴양지로 여행을 다녀왔다. 비행기 요금, 호텔 숙박비, 식비 그리고 팁까지 모든 경비를 미리 지불하는 방식으로 예약했더니 부담 없이 먹고, 마시고 쉬면 되니 참 편했다. 리조트 내의 어느 술 가게나 호텔 로비에 앉아 있어도 종업원이 와서 필요한 음료수가 무언지 물어보고는 바로 갖다주고, 어떤 식당에 가도 무엇이든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 겨울철이라지만, 기온이 섭씨 30도 가까이 되는 날씨라서 해변에서는 헝겊 두 쪽만 걸치고 수영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미스 유니버스 못지않은 늘씬한 미녀들을 수없이 볼 수 있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우리가 묵은 곳의 지명이 시안 칸이었는데 마야어로 천국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뜻이라 했다. 일 년 내내 날씨가 좋고 경관도 빼어나니 오랜 전부터 여기서 살던 원주민들도 여기가 바로 천국 입구라 여겼던 듯싶다.   

 

리조트 단지는 멕시코의 동쪽 끝에 있는 유카탄반도의 여러 마을에 걸쳐서 자리 잡았는데, 이 반도는 바다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멕시코만 카리브해 나누는데 유카탄이라는 지명은 아즈텍어로 풍요로운 땅을 뜻하는 요카트란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온종일 전동차로 리조트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다가 싫증 나면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며 가끔은 아주 오래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영상을 생각했다. 하도 오래되어서 제목이 유카탄 아리랑이었는지 애니껭(=에네켄의 한국식 표기)’이었는지, 극영화였는지 다큐멘터리였는지도 기억이 희미하지만 100여 년 전에 바로 이 지역으로 이민 온 천여 명의 우리 선조들 이야기였다.

 

그들은 1905년 우리가 머물던 리조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여 주변 22개 에네켄(=용설란) 농장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을 시작했다. 일본인 상인에게 속아 사실상 노예로 팔려 와서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고 혹사당하던 그들은 4년간의 의무 노동계약이 끝나고도 일본의 강점으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지자 유카탄반도와 티후아나 등 멕시코 전역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시와 주변 지역에는 35세대 한인 후손 7,000여 명이 거주 중이라고 한다

 

유튜브로 찾아보니 장미희가 주연한 애니껭이라는 영화와 몇 가지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영화를 보니 노동자들은 삶은 콩과 소금뿐인 식사를 억지로 먹으며 위장 질환에 시달리다 죽어가기도 했고, 밧줄 원료로 사용되는 에네켄 잎을 하루에 2,000개씩 채취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현지 마야인들과 결혼하여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후손들에게서 한국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한국어를 아는 이들도 거의 없다고 하지만, 가끔 몇 대조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아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하는 일 없이 아침부터 데킬라, 위스키, 맥주등등의 온갖 술을 쉴 새 없이 마시고 시도 때도 없이 엄청나게 쌓인 음식을 원 없이 먹었더니 그러지 않아도 약한 위장이 탈이 나서 고생하며 오래 전 열악한 음식을 먹으며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초기 이민자들을 생각하니 죄송했다. 그래도 먹는 게 남는 건데. 소화제를 먹어가며 또 마시고 먹었으니 속아서 황금향이란 데를 찾아왔건만, 굶주림에 시달리던 분들의 한을 후손인 내가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다.

 

오늘 아침, 내가 사는 곳의 날씨는 제법 쌀쌀하다. 산책길에 만난 이웃 사람, 지그라는 아저씨가 버릇대로 왼손으로 거수경례를 하며 당신 이런 날씨에는 멕시코가 그립겠네. 또 가고 싶지?” 라고 물었다. 글쎄다. 좀 추울 때도 있지만, 내 집이 좋지. 맵고 짠 소박한 음식을 즐기며 가끔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잖아.

 

(202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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