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장자 철학서 읽기

삼척감자 2022. 9. 6. 03:24

심심풀이로 내용이 그리 무겁지 않은 소설을 읽는 사람을 가끔 볼 수는 있어도 고전과 사회과학서를 열심히 읽는 사람은 흔치 않다. 보고 즐길 게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볼 시간을 쪼개어 독서라는 걸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젊은이들은 수험 관련 서적이나 자기계발서를 보며 그걸 독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주위에 고전과 사회과학에 관한 책을 열심히 사모아서 읽는 분이 한 분 있는데 나는 그분을 희귀동물(죄송)이라고 여긴다. 독서라야 소설책이나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내 수준으로는 읽어도 머리만 아프고, 돈 안 되는 그런 책을 읽는 사람이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얼마 전에 그 댁에 놀러 갔더니 서가에서 책 몇 권을 꺼내와서 보여주며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빌려 가라고 하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단테의 신곡,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장자 철학등의 책이었다. 보기에도 묵직하고, 제목만 보아도 골머리가 아파지는 책을 빌린다? 내 수준에 맞지 않고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책들이어서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려고 하다가 마지 못 해서 장자 철학을 골라서 집었다. 젊어서 노장 사상서 중에 노자 도덕경을 읽은 적이 있었기에 좀 친숙한 느낌이 들었고, 장자의 호접지몽(蝴蜨之夢, 나비의 꿈)’이나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유명한 일화를 몇 가지 알고 있기에 그래도 그 책을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생일 때 순수학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실용적인 전기공학을 전공했기에 그걸로 직장을 구하기는 했다. 응용과학을 전공한 게 인문과학을 전공한 것보다는 먹고 사는 데 더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사물의 이치를 캐기에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순수과학을 전공한 사람보다는 부족한 점이 있고, 인생의 오묘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는 언어, 예술, 역사 및 사상 같은 인문과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훨씬 못 미칠 수밖에 없다.

 

대학교 1, 2학년일 때 교양과목으로 언어, 역사, 사상에 관련된 과목 몇 가지를 수강했지만, 학점을 따기 위해 수박 겉핥기 식으로 공부했을 뿐 전공과목 공부하듯이 열심히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게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과 그렇지 않은 과목의 차이였다. 철학은 김형석 교수에게서 수강했는데, 어려운 철학을 조곤조곤 알기 쉽게 풀어주셔서 강의가 재미있었다. 그게 55년 전이니, 그분의 나이 48세였을 때고, 내 나이 18세였으니 중년과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각각 103세와 73세의 늙은 할아버지와 젊은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누군가가 철학이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하게 해주는 학문이라고 했다지만, 나는 그 긴 세월 그런 철학 공부보다는 술을 가까이하며 쉽게 행복해지는 길을 택했으니 김교수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700쪽 가까이 되는 장자 철학를 며칠 동안 뒤적이다가 드디어 서문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읽기가 힘들다. 철학 분야의 독서가 부족해서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문과학에 관한 내 소양이 부족한 때문인 것 같다. 억지로 읽으려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읽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이러다가는 완독하는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다. 끈기가 부족한 내 성격으로는 완독이란 꿈도 못 꿀 일이라서 접근 방식을 달리하기로 했다.

 

우선 잘 알려진 일화 몇 개를 골라서 읽어 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통해 골라본 것들은 다음과 같다. ‘()과 붕()’, ‘상대적인 기준’, ‘무용지용(無用之用)’, ‘조삼모사(朝三暮四)’, ‘호접지몽(蝴蜨之夢)’, ‘공자와 노자의 대화’, ‘죽음과 자연’, ‘견리망의(見利忘義)’ 등이다. 이러한 일화에 해당하는 대목을 두꺼운 책에서 찾아서 하나하나 읽어 보고 장자 철학을 읽어 보았노라고 허풍을 떨려고 하지만, 이마저 쉽지 않다. 그래도 힘들게 찾은 글을 읽다 보면 대개는 예전에 본듯한 글귀라서 반갑지만, 이런 글 읽기가 그리 즐겁지는 않다. 때로는 글귀를 찾다가 뜻밖에도 마음에 와닿는 걸 우연히 보게되면 횡재한 것 같다. 이를테면 오늘 우연히 발견한 이런 구절이다.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 하지만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이 있는 것이다. 옳음이 있으므로 옳지 않음이 있다. 옳음에 연유해서 틀림이 있고 틀림을 근거로 옳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상대적인 시시비비를 떠나 홀로 도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긍정이다.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대통령 선거로 “여가 옳으니 야가 옳으니”하며 편 가르기가 한창인 고국의 유권자들이 이 글을 보면 다들 너그러워질 수 있을 텐데.

(2022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