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삼척감자 2022. 9. 3. 07:15

몇 달 전에 어떤 고등학교 동창생이 동창 웹사이트에 ‘줄여서 보는 로마인 이야기’라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친구가 할 일은 없고 시간이 남아 돌아가니 이런 글을 올리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그가 올린 글을 훑어보았다. 처음 두어 회를 읽어 보니 결코 심심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 내용이 충실했고, 짜임새가 있었으며, 나름대로 확고한 역사관이 드러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글이 전문 역사학자가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PDF로 보관하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열다섯 권 중 처음 두 권만 읽고 말았던지라 그의 요약본이 반가웠다. 나이 드니 장시간 머리를 숙이기도, 책을 들고 활자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힘들어서 한 권이라면 몰라도 열다섯 권씩이나 읽는다는 건 보통 결심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이참에 그가 줄여서 정리한 글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를 모두 읽었노라고 허풍을 떨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가 올리는 연재물을 꼼꼼하게 챙겨 보기 시작했다.

 

회수를 거듭할수록 그간의 내 독서의 폭이 좁았음을 느끼며, 세계사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젊어서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홍루몽 같은 중국 연의 소설을 여러 차례 재미있게 거듭 읽으며 보낸 시간이 아까웠다. 온통 허풍투성이인 허접한 것들을 읽을 시간에 차라리 세계사 공부나 열심히 할 걸  하고 후회했다.

 

고등학교 때 숭인동 버스 정거장 옆에 있던 관우 사당을 별 생각 없이 지나치며 왜 역사적인 명장을 수두룩하게 배출한 우리가 그들의 사당을 시내 번화가에 모시지 않고 엉뚱하게 그런 중국인의 사당을 왜 모시는지 분개하지 않았던 것도 부끄러웠다. 우리가 그런 연의 소설을 읽고 알게 모르게 사대주의에 물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게재하는 글이 늘어갈수록 중국에 치우친 편향된 세계관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가 중심이 된 서양사도 제대로 공부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인 이야기 4~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다시 꺼내어서 읽어보니 그 인물에 대해 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단순히 전쟁 영웅으로만 알고 있던 그가 희대의 천재, 탁월한, 정치인, 키케로와 쌍벽을 이루는 문인, 역사상 손꼽히는 바람둥이등 다양한 면모를 가진 걸 알게 되니 로마인 이야기 전체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가 올리는 요약본을 다 읽은 다음 로마인 이야기 열다섯 권을 완독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동안 연재된 내용을 따로 책으로 묶어서 곁에 두고 읽고 또 읽으면 날로 떨어지는 기억력을 보완할 수 있겠다 싶어서, ‘한국어맞춤법 검사기’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꼼꼼히 교정을 보고 있다. 이 작업은 연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연재가 끝나고, 교정을 모두 마친 글은 내가 평소에 애용하던 온라인 출판사를 통해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탄생할 것이다. 서투른 솜씨로 직접 표지 디자인도 해야 하겠고. 그 책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본이 될 테니 곁에 두고 아낄 생각이다. 로마 역사에 관심이 있고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온갖 생색을 내며 빌려줄 것이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나이 들어서 이렇게 독서 의욕을 불러일으킨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오랜 시간 요약 작업에 매달렸을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던 백수인 내가 돈 안 되는 교정 작업에 매달리며 세상에 한 권 밖에 없을 책 만들기라는 일거리로 시간을 보내니 오랜만에 보람 있는 일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2021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