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 국회의원이 밝은색 원피스를 입고 등원한 걸 놓고 몇 날 며칠을 떠들어내는 걸 보니 ‘참 할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의원들까지도 ‘국회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며 비난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국회의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진 게 언제인데 고작 여성의원의 옷차림을 두고 권위 실추를 논하다니. 그 여성 의원이 입었던 옷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정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단정해서 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고 성적인 매력을 강조해서 남성 의원들의 마음을 흔들만한 복장도 아니었다. 정장을 입지 않더라도 일이나 제대로 한다면 나는 그런 정도의 복장이 비난받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원피스보다는 정장을 입으면 낫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꼰대라서 그럴까?
며칠 전에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의 동영상을 보았다. 여섯 살에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열 살에 국제무대에 등장했다니 대단한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려는 복장 탓인지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온통 드러낸 가슴에 시선이 자주 갔다. 그런데도 흔들림 없이 그녀 바로 앞에서 지휘에 집중하는 지휘자 주빈 메타가 존경스러웠다. 나이 일흔이 넘은 나도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이 마구 흔들렸는데 젊은 남성들은 음악에 몰입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수없이 달린 댓글도 대부분 그녀의 연주 실력보다는 가슴에 대한 찬사 일색이었다. 노출이 심한 무대의상이 아름다운 몸매는 드러낼지 몰라도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리는 게 안타까웠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은 심각한 척추 측만증으로 자기 손으로 머리조차 제대로 빗지 못하던 꼽추였으며, 뼈와 세포가 붙어버려서 쪼그라들어가는 몸뚱이를 지탱하기 위해 등과 허리를 감싼 채 연주해야 했다. 남아 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외모에 답답해 보이는 옷을 입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녀는 외모가 아니라 온전히 연주실력만으로 피아노의 성녀라고 불리었고 그녀의 연주회는 늘 열광적인 관중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30년 전에 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설 부서의 책임자로 미국 남부의 소도시에서 몇 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다. 직장 생활에 한계를 느껴서 사의를 표했더니, 얼마 후 내 상관이던 분이 업무를 점검하러 출장을 왔다. 그분은 이것저것 챙겨보더니 불만스러웠던 게 적지 않았던지 주말에 업무 회의를 하자고 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내가 텅 빈 사무실에 출근하고, 얼마 후 정장 차림의 상관이 나타나더니 나를 흘끗 보고는 “온통 x판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며 사무실 구석에 둔 빈 제품 상자를 걷어찼다. 그놈의 빈 상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당신 그 복장이 뭐야. 자세가 영 글러 먹었어!”라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공식 업무를 보지 않는 주말이라지만, 상관을 모시고 회의를 할 때는 정장 차림을 해야 한다며, “당신 미국에 몇 년 살더니, 미국 사람이 다 되었구먼”이라고 했다. 어차피 그만두기로 하고 후임자를 기다리던 제대 말년이라 그의 말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썩 나빴다. “나보다 직위가 높기는 했지만, 그 자리가 뭐 그리 대단한 자리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휴일에 편한 차림으로 회사에 나오는 게 책망을 받을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직장 내 자율복장제의 영향으로 업무 현장에서도 격식 없는 차림이 주목을 받고 있고,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비즈니스 기회가 줄어든 데다 재택근무, 비대면 회의의 확산으로 정장을 할 일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한 복장이 있다. 예를 들면, 종교의식에 반바지나 청바지, 샌들 그리고 노출이 심한 복장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부적절해 보이고, 장례식이나 결혼식에는 애도 분위기나 축하 분위기를 깨지 않는 복장이 적절하겠고, 웃어른을 만날 때는 점잖은 차림을 하는 건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지켜야 할 예절이겠다. 그래서 소속 단체나 모임의 성격, 장소에 따라 묵시적이나 명시적으로 지켜야 할 복장 규정(Dress Code)이라는 게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2020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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