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22

치과병원을 다녀와서

스케일링을 받으러 반년 만에 치과병원을 찾았다. 이 나이 되도록 충치나 잇몸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지만, 몇 년 전에 단단한 음식을 씹다가 이가 깨진 적은 두어 번 있다.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니 다행이다. 내 단골 치과의사는 한국인인데, 스케일링 정도는 미국인 여성 조수들이 갈 때마다 번갈아 가며 처리해 주고, 의사는 작업이 다 끝난 후 잠깐 들어와서 입안을 대강 훑어보고는 나이에 비해 치아가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깨어진 이빨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뽑으라고 매번 권한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은 별문제 없으니 갈 데까지 가보겠다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돈이 아깝고, 뽑은 후에 있을 후유증이 걱정되기 때문에 그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이다. 과묵한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내지만, ..

가족 이야기 2023.06.11

몸에서 나는 냄새

전쟁을 전후하여 태어난 우리 세대가 어릴 적에는 세숫비누와 빨랫비누의 구분이 없었다. 작은 벽돌만 한 무궁화 표 빨랫비누로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목욕탕에 갈 때도 그걸 갖고 가서 온몸을 씻었다. 작가 강신재의 단편 소설 ‘젊은 느티나무’는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소설에서 그는 대단한 부자 아버지를 두었으니, 그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는 무궁화 표 빨랫비누 냄새가 아니고 외제 세숫비누의 향긋한 냄새였을 것이다. 작가는 이 문장을 통해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끌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문장이 생각난 건 어머니날을 며칠 앞두고 출장 온 큰딸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였다. 지중해식 식당에서 어머니날 축하 요리를 즐기며 외손자와 두 외손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가족 이야기 2023.05.12

내 기억력도 이제는 믿을 게 못 된다

5월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갑자기 5월에 생일을 맞는 외손자가 생각났다. 작은딸의 외동아들인데, 빼어난 유머 감각으로 학교에서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인기 짱이며, 우리 부부와 화상통화를 할 때마다 한국어로 인사를 해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귀염둥이다. 그래서 아마존을 열심히 뒤져 선물 한 가지를 골라서 작은딸에게 이메일로 어떤지 물어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내 실수를 깨달았다. 그 아이 생일이 5월이 아니고, 7월인 것을. 5월에는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큰딸네 막내딸의 생일이 들어 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니 6월에는 큰딸의 아들 생일이, 11월에는 큰딸의 큰딸 생일이 들어 있고, 1월에는 작은딸, 2월에는 큰딸, 7월에는 ..

가족 이야기 2023.05.04

형탄절(炯誕節) 아침에

오늘은 형탄절이다. 성탄절이 아니고, 웬 형탄절? 김형기(金炯基)라는 사람이 탄생한 날을 형탄절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른담. 손꼽아 세어보니 오늘이 만으로 일흔네 살 되는 날이다. 인제 와서, 한 살 더 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될 거도 아니고, 백 살까지 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나이 드니 편한 게 참 많다. 그 중 하나만 꼽으라면, 매일 뭔가에 끌려가지 않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거다. 어저께 저녁 무렵 구수한 고기 익는 냄새가 나기에 아내에게 내 생일은 내일인데 벌써 잔치 준비를 하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형탄절 전야제 준비를 하는 거란다. 저녁 밥상을 보니 큰 그릇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영계백숙이 올라와 있었다. 그걸 보니 아름..

가족 이야기 2023.03.26

동방 박사의 선물

‘동방 박사의 선물(The Gift of the Magi)’은 오 헨리가 1905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유명한 소설이라 줄거리와 결말은 잘 알려졌지만,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임스 딜링햄 영’ 부부에게는 두 사람 모두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편 짐(=제임스의 약칭)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며 물려받은 금시계였고, 다른 하나는 아내 델라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습니다.” ​ 그런데 귀중한 금시계에는 시곗줄 대신 낡은 가죽끈이 묶여 있어서 남편은 시계를 꺼낼 때마다 부끄러워했다. 아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손질할 때 쓸 고급 빗 세트를 갖고 싶어 했다. 가난한 그들은 크리스마스에 서로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은 금시계를 팔았고, 아내는 ..

가족 이야기 2023.02.02

꿈은 이루어진다니까

나이 일흔을 넘어서고는 주량이 무척 준 걸 느끼게 된다. 주량이 준 건 나이 탓도 있지만, 50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극적으로 줄었다. 사고 후 병원에 반년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 후 두어 달 지나고 나서 술잔을 식탁에서 내 입으로 운반하는 팔운동을 다시 시작했으니 여덟 달 남짓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한 셈이다. 오랫동안 굶었던, 그리운 술이었는데도 처음에는 그리 반갑지 않아서 두어 모금 마시는 정도로 그쳤으니 아무래도 쇠약해진 몸 탓에 그랬던 것 같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주량은 그다지 늘지 않아 지금도 소주 한 병이면 알딸딸해져서 더는 마실 생각이 없어지니 이제는 술꾼이라는 말을 듣기에는 어림도 없다. 원 없이 술을 마시다가 건강을 해쳐서 쉰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가족 이야기 2023.01.25

할아버지는 외계인

회사 후배 K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퍼온 글 ‘은퇴 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재미있게 읽으며 글의 내용에 공감했다. 특히, “손자가 좋아 죽겠다고 카톡 프로필까지 손주 사진으로 도배를 해 놓고 할아버지가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일곱 살 될 때까지 보육원장 놀이하기”라는 대목에서 크게 웃었다.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면 만 여섯 살이 되겠다. 지나고 보니 우리 큰 외손녀도 그랬다. 태어나고 얼마 동안은 낯가림이 심해서 우리 부부의 얼굴을 보면 삐쭉거리며 울었다. 좀 지나니 오랜만에 우리 부부를 만나면 반갑다는 듯이 방긋거려서 먼 길 달려온 보람을 느끼게 했다. 말하기를 시작하고는 우리가 가면 온몸으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세 살 좀 지나서는 우리가 떠날 때는 다리를 잡고는 가지 말라고 매달려서 돌아..

가족 이야기 2022.09.07

할아버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대 유행이 시작된 지 벌써 일 년 반 정도 지났다. 그동안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작은딸 집은 물론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큰딸 집도 방문하지 못 하다가 지난 주 토요일에 일 년 하고도 두어 달 만에 방문했다. 그동안 두어 차례 정도 딸네 집 근처 공원에서 잠깐 본 적도 있었고, 매주 한 번 정도 화상 통화로 얼굴을 잊지 않을 정도로 외손녀와 외손자를 보기는 했지만, 집 안에 들어가서 그들과 여러 시간 함께 지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고 확진률과 사망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우리 부부와 큰딸 내외도 백신 접종을 마쳤기에 둘째 외손녀의 생일을 맞아 드디어 큰딸 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낯설었던지 열 살 된..

가족 이야기 2022.09.07

코로나바이러스 시국의 반보기

조선 시대에는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 했을 정도로 평상시 친정과의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농번기를 벗어나는 추석 무렵이 되면 하루 정도 짬을 내어 외출하는 것이 묵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룻밤 묵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가 멀 경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반보기로 보인다. 약속한 날짜에 양쪽 집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그날 돌아오는 당일치기의 만남이었다. (한국 민속대백과사전) 그 시절의 노랫말이 '반보기 구전민요'로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이 참 애절하다. 그중 일부만 아래와 같이 인용해 본다. '하도하도 보고저워 반보기를 허락받아/ 이 몸이 절반가고 어메가 절반 오시어/ 새 중간의 복바위에서 눈물콧물 다 흘리며/ 엄마엄마 울엄마야, 날 보내고 어이 살았노.' 얼마..

가족 이야기 2022.09.07

유언장을 작성하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자가 격리가 시작되고 미국 내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들으며 ‘진작에 유언장을 만들어 둘 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에 교통사고라는 날벼락을 맞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나는 죽음이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누구든 죽는다는 사실을 절감했기에 유언장을 미리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었고, 변호사인 큰딸도 몇 년 전부터 유언장을 미리 만들어 두자고 권하며 유언장 전문 변호사까지 알아 두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몇 년을 끌다가 이번에 마음이 바빠진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여러 차례 유언장 내용에 대하여 큰딸을 비롯한 가족들과 다음과 같이 의견을 교환해 두었다. 1. 장례는 매장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화장으로 할 것인가? 본인의 신앙이나 인생관에 따라 ..

가족 이야기 20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