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15

뜻밖에 쏟아진 은총

스물한 살,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스님이 두어 분밖에 없는 서울 근교의 작은 절에서 몇 주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스님들은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 세 시 정각에 일어나서 절 주위를 돌며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다. 나는 매일 새벽, 그 소리에 잠을 깨서 투덜거리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 많던 젊은 나이였는지라 이른 새벽에 들리던 그 소리가 참 싫었고,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스님 노릇도 쉽지 않아 보였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절단한 나는 가끔 절단 부위의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통증이라고 하지만 못 견디게 아프지는 않고 찌릿 거리는 가벼운 전기 자극 같은 것이다. 반갑지 않은 통증이 밤중에 찾아오면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신문..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마누라야 물렀거라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성당 기도회에 가고 나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있었다. 영화는 그리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아서 별로 집중하지 않고 건성으로 보던 참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음 대사가 귓전을 때렸다.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늙고 병든 화가를 방문한 이웃집 대학생이 걷는 게 부자유스러운 그에게 워커(Walker) 사용을 권했더니 짜증을 내는 장면이었다.  “이딴 거 말고 지팡이를 줘, 막대기말이야. 워커는 안 쓸 거야. 그건 죽을 날이 가까운 늙은이나 쓰는 거야.”“지팡이보다는 워커가 낫지 않아요?”“적군과 맞설 때 쓸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달란 말이야.” 워커는 바퀴 두 개와 밑받침 두 개, 아니면 바퀴만 네 개 달린 작고 가벼운 밀차 비슷한 건데 ..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의족만 끼면 불편 없이 살 수 있다던데요

‘600만 불의 사나이’란 유명한 미국 드라마가 있다. 우주 조종사로 일하다 사고로 팔, 다리 그리고 눈을 잃은 주인공이 생체공학 수술을 받고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된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의 수술비용으로 600만 달러가 들었다고 ‘600만 불의 사나이’란 제목이 붙여졌다고 한다. 드라마가 제작된 게 70년대 후반이니 그동안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할 때 지금 화폐 가치로는 2,400만 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 돈을 들인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 및 의료 수준으로는 아직 그런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 및 치료에 든 비용을 그간의 물가 상승률을 따져 지금 화폐 가치로 계산하면 거의 300만 불이 되니 나도 적지 않은 의료비를 썼지만, 초인적인 능력은커녕 다리 하나..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골프여 안녕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 하나를 절단한 후 오랫동안 병원과 재활원 신세를 졌다. 퇴원 후에는 매주 여러 번 재활원에 통원하며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생활 적응 훈련과 체력 강화 훈련을 받았는데, 휠체어 굴리기로 시작된 훈련이 절단된 다리에 의족을 끼고 쌍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적응 훈련에는 평지 걷기, 계단 오르내리기, 다른 사람 어깨 짚고 걷기, 실물 모형이 비치된 장소에서 은행 이용하기, 시장 보기, 그리고 부엌에서 일하는 연습 등 실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반복 연습이 포함되었다. 재활 훈련을 모두 끝내고 집에서 독서로 소일하던 어느 날 ‘다리 절단 장애인 골프회’라는 곳에서 초대장을 받았다. 다리를 절단한 사람에게 골프 지도를 해 주고 회원들끼리 골프도 함께 즐기는 모임이..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미국에 주재원으로 파견된 지 겨우 한 달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30여 년 전 1월 어느 매우 추운 날에 출장을 떠났다. 새벽에 뉴저지를 떠나 미시간 주, 트로이에 있는 K-Mart 본부를 방문하고 당일 오후에 오클라호마 주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있는 TG&Y 본부를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특별한 용무 없이 부임 인사를 위해 대형 거래처를 방문하는, 마음 가볍게 떠난 출장이었지만 신통치 않은 영어 때문에 적지 않게 신경이 쓰였고, 미국 사정에 익숙하지 않아 새벽에 택시 부르는 것부터 호텔에서 묵는 것까지 쉬운 일이 없었다. 아침에 미국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이 모여 있다는 디트로이트의 공항에 내려 키가 후리후리하고 아름다운 백인 여자들이 두꺼운 고급 모피 코트를 입고 로비를 바쁘게 오가는 걸 보고 북쪽 지..

교통사고 이후 20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