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6 15

나는 왕자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거의 90년 전에 홍사용 시인이 발표한 시의 제목이다. 내가 요즈음 아내에게 가끔 하는 싱거운 말인 ‘나는 왕자로소이다.’는 홍사용 시인의 시와 아주 다른 내용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파트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먼저 내려서 몇 걸음 걸어가던 남자가 얼른 되돌아와서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내가 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내 신분이 드러난 것 아니야? 아무래도 저 사람, 내가 왕자인 걸 아는 눈치던데.”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별로 잘 난 데가 없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던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고 쌍크러치를 짚고부터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어디서든 건물이나 방에 드나들 때는 어디에서인가 나타나 문을 열고 손잡이를 잡고..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아픈 사람이 왜 그리 많을까?

저녁 식사 후 운동하러 아파트 로비 옆에 있는 체육관으로 가는데 우편물 보관실 카운터에 놓인 카드 석 장이 눈에 띄었다. 누가 세상을 떠나거나 입원하면 아파트 주민 누구라도 가족이나 본인에게 위로나 격려의 말을 적어서 전하도록 카운터 위에 카드를 놓아 두는데, 입주자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이라 70여 세대밖에 살지 않는 우리 건물이지만, 그런 카드가 자주 놓인다. 대개는 한 장씩 놓이는데 이번에는 한꺼번에 석 장이나 보여서 궁금한 마음에 카드를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왼쪽 카드는 “케빈, 퇴원을 축하합니다. 이제는 푹 쉬며 인생을 즐기세요.” 이런 문구가 씌어 있었는데, 케빈 할아버지가 누구더라? 혹시 늘 휴대용 산소 호흡기를 끼고 지내는 1층에 사는 할아버지가 아닐까? 아무튼, 위급한 상황을 넘..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나비의 꿈, 장주의 꿈, 나의 꿈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내 왼쪽 다리를 절단하며 뼈를 둥그렇게 다듬었는데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던지 일부가 볼록하게 튀어나와서 의족을 착용하면 그 부분의 피부가 잘 상한다. 절단으로 뼈가 드러난 부분에는 허벅지 살을 떼어서 이식하였는데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색깔도 거무죽죽한데 아무래도 이식한 피부가 약해서 의족을 오래 끼고 있으면 아프기도 하지만 짓무르거나 상하는 일이 잦다.  아주 드물게는 절단 부분이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찌릿거려서 매우 고통스럽다. 일단 찌릿거리기 시작하면 비명이 저절로 나올 정도인데다가 제법 오래 가므로 밤에 그런 일이 생기면 잠자는 건 아예 포기해야 한다. 그럴 때는 통증이 어서 지나가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대책이 없다.     오늘도 외출에서 돌아와 낮잠을..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나 홀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을 나 홀로 오르고 있었다. 새나 벌레 그리고 짐승도 보이지 않고 나무도 없이 억새나 갈대처럼 생긴 풀로만 온통 뒤덮인 산의 풍경은 삭막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은 흐리고, 강한 바람이 불다가 그치고, 그쳤다가 불기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키 큰 풀들이 이리저리 어지러이 흔들렸다. 좀 떨어진 산꼭대기에 다 쓰러져가는 외딴 오두막집이 보였다. 최근에 이사 온 가족 세 명이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누군가가 소곤거리는데 말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몸이 오싹하도록 찬 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혼자 허위허위 걸으려니 스산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두 달 동안 깊은 잠에 빠졌었다. 남들은 ..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제발 잠 좀 잡시다

뉴욕 타임즈에 게재된 어느 간호사의 글에서 “간호학교에 입학하고, 첫 강의에서 어느 교수가 환자 치료의 역설적인 진실 중 하나로서 ‘환자는 병원에 잠자러 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라는 대목을 보고 내가 교통사고 후 병원에 몇 달 입원해 있는 동안 내내 수면 부족으로 고통받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또 “정신 건강을 위해서,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그리고 강력한 면역 체계의 유지를 위해서 환자는 잘 자야 하지만,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밤마다 도막 잠에 시달리며 제대로 잘 수 없는 게 현실이다.”라고 썼다. 더 읽어 보니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데도 우선순위가 있는데 시간 맞춰서 하는 검사와 투약이 환자의 수면보다 순위가 앞선다는 얘기였다.  병원에 입원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온종일 밤낮으로 병상에 누워있..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1번 쉬, 2번 응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과 재활원에 몇 달 동안 입원하였을 때 다리 하나를 잃은 나에게 재활원에서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기만 해서 축 늘어진 근육을 강화하는 근력 운동과 평행봉을 짚고 일어서는 훈련을 주로 시켰다.     몸이 차차 회복되면서 늘 차고 있던 성인용 기저귀 사용 횟수를 줄이기 위해 대소변 용기를 사용해서 배변을 처리하는 훈련을 받았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휠체어로 내려오고, 누군가가 휠체어를 밀어주어야 재활원 내에서 이동하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화장실 이용은 꿈도 못 꾸었고 산소 호흡기 사용을 위해 기도에 뚫은 구멍 때문에 말을 전혀 할 수 없을 때였다.      어느 날 씩씩하게 생긴 간호사가 큰 볼일과 작은 볼일을 보고 실을 때 의사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내가 사흘 동안 걸을 수 있다면

대학교 1학년 때 영어 교과서에 실렸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 이라는 수필을 읽고 잔잔한 감동을 느꼈었다. 앨라배마 주에 살 때, 집에서 자동차로 가면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던 헬렌 켈러의 생가를 가족과 함께 찾아본 건 예전에 읽은 그녀의 수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였지만 그녀는 만약 자신이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낄 것인지를 'Three days to see'란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발표했다. 헬렌 켈러의 글은 당시 경제 대공황의 후유증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을 잔잔히 위로했다고 한다. 우리가 무심코 마주하는 이 세계가 날마다 기적 같은 것임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체적 ..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환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0여 년 전에 영세하고 바로 냉담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분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서 우리 옆 동네에 산다는 그분의 연락처를 알아낸 다음에 병원을 방문하였다.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하여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말하는 것조차 힘에 겨워하는 그분의 목소리는 가냘파서 알아듣기가 매우 어려웠다. 병상 옆에는 손도 대지 않은 아침 식사가 그대로 있었고, 우리가 있는 동안에 간호사가 점심을 가져다주었지만, 음식만 보면 토할 것 같다기에 식사를 권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가족이 옆에서 어르고 달래가며 조금씩 자주 음식을 먹도록 해야 할 텐데. 가족은 생업에 바빠서 옆에서 병간호할 수 없다니 안타까웠다. 통증이 심해서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하고 식사를..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죄수 아닌 죄수, 중환자

‘환자’라는 영어 단어인 Patient에는 형용사로 ‘참을성이 있는’ 또는 ‘끈기 있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환자는 병들었거나 다쳐서 의료적으로 돌보아 주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Patient의 본래 의미는 ‘고통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 모두를 환자라 부를 수 있으니, 환자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진다. 죄를 짓거나 전쟁 중에 적군에게 잡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유를 빼앗기고 정해진 공간에 억류된 사람을 죄수 또는 포로라고 부르는데 입원한 중환자는 스스로 원하지 않았는데도 병상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갇혀서 육신의 자유를 잃고 지내니 죄수나 다름이 없다. 건강을 잃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거나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환자는 오히려 죄수보다 더 큰 고..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장애는 극복이 안 되는 거다

내가 휠체어 굴리는 연습을 시작한 건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고 3개월 지나 재활원에서였다. 바닥이 미끄러운 재활원 복도에서 처음 휠체어 굴리는 연습을 할 때는 기운이 없었지만, 슬슬 잘 굴릴 수 있었다. 퇴원 후에 카펫이 깔린 아파트 복도에서 휠체어를 굴려보니 조금 힘들었다. 경사진 실내 바닥은 매우 힘들고 바닥이 균일하지 않은 실외에서 휠체어 굴리는 건 더욱 힘들다. 그럴 때는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 어야 한다. 내가 다리 하나를 잃기 전에는 휠체어는 바퀴를 슬슬 돌리면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미끄럽게 굴러가는 줄 알았다.  대학병원에서 재활원으로 옮긴 다음 날 아침에 입원실 앞에 준비해 둔 휠체어를 보는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아, 그렇지. 휠체어로 생활하면 되겠구나.” 대학병원에서 지낼 때는 다..

교통사고 이후 202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