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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잊으랴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리 하나를 잃은 날이 바로 19년 전 오늘이었다.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잊을 수 없는 날이기에 해마다 오늘이 되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서 고마운 날”을 기념한다. 거국적인 기념일이 아니니 애국가 봉창이라던가  그런 거창한 건 생략하고 많은 고마운 분에게 마음속으로 두루두루 감사드리고 저녁에 간단히 술 한잔하며 기념일을 보낸다. 오늘은 마침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을 은인들 대표로 삼아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오랜 세월, 망가졌지만, 열심히 버텨 준 내 몸에게도 감사해야 하겠다. 그리고 다리 절단 이후 가끔 찾아와서 편히 잠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언제 만나도 반갑지 않은 환상통에게는 “이제 제발 그만 찾아오너라.”라며 작별을 고해야 하겠다. 지난 열아홉 해,..

교통사고 이후 2024.06.27

엔지 할머니

에어컨 덕분에 시원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습관대로 동네 한 바퀴를 걷기 시작했는데 좀 더웠다. 덥다 못해 피부에 와닿는 햇살이 따가웠다.머리에 쓴 모자만 믿고 조금 걷다 보니 너무 더워서 포기할까, 말까 하고 갈등을 느끼는데, 마침 담배 피우러 집밖에 나와 있던 엔지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대강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다. “스티브, 이 미친놈아. 너 죽으려고 환장했니? 당장 걷는 거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 당장.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구시렁구시렁……”계속 걷기에는 더위보다는 할머니 욕설이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뒤로 전진해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야, 이거 받아!”라는 고함이 들려서 돌아보니 바로 엔지 ..

미국 생활 2024.06.22

메리라는 여자

얼마 전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이웃 영감이 느닷없이 말을 던졌다.“당신 메리라는 여자 알지?”“알다마다요. 패션모델 출신이었다는 여자 말이지요?”노인들이 사는 콘도 단지에서 60대 초반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아직도 뒤태에 눈길이 끌리게 하는 패션모델 출신 독신 여성은 동네 영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그 여자, 좀 이상한 여자야. 말 섞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몇 달에 한 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길을 휙 지나가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을 만나도 거의 아는 체하지 않고 언제나 밀짚모자 같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집 앞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을 때 말고는 오래된 현대 엘란트라와 시간을 보낸다.차에 덮개를 씌우..

미국 생활 2024.06.19

성당 설립 40주년 기념집

벼락치기로 성당 설립 40주년 기념집을 만들었다.단기간에, 비용을 적게 들여서, 소책자 형식의 기념집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것저것 조건이 딱 맞아떨어져서 당초 목적한 대로 만들 수 있었다.수십 년 간의 역사 자료 중 빠진 것도 적지 않았지만, 정리해서 연혁을 만들어 보았다. 적지 않은 내 나이에 그런 작업이 감당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대로 완성할 수 있었다.신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원고가 제대로 들어올지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예상보다는 많이 들어와서 다행으로 여긴다.오랫동안 거래하던 미국 출판사를 통해 제작 비용도 무척 싸게 들었으니 어려운 성당 재정에 그것도 참 다행스럽다.시간 절약을 위해 실무적인 작업을 혼자서 다 했더니, 부족한 점이 적지 않을까 봐 걱정스럽기는 하나 그만하면 잘 된 것 같다..

신앙 공동체 2024.06.13

작은딸의 출장

작은딸에게서 일주일 예정으로 프랑스 출장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연락을 받고 나서 내가 지금의 딸들보다 더 젊었을 적에 출장 다닌 일이 생각났다.늘 큰 고객에게 호출받아서 부품 공급에 문제가 많다거나, 품질 관리에 더 유의해야 한다는 등의 잔소리나 야단을 맞는 게 출장 가는 까닭이었으니 떠나기 전에도 마음이 무거웠고, 돌아오면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서비스 부서의 책임자는 늘 을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담당지역이 미국이었으니 주로 미국 내의 큰 거래처를 방문했지만, 가끔은 한국 내 생산 부서로 출장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내가 갑의 입장이 되기는 했지만, 같은 회사 직원끼리 눈살 찌푸려 봐야 업무의 사안에 따라 갑을 관계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서로 심한 말은 자제하는 게 불문율이었다.작은딸의 이번 ..

가족 이야기 2024.06.11

바람피운 남편이 아직도 용서가 안 되어서

아침 산책길에 85세인 중국 태생 할머니 헬렌을 만났다. 외출복을 입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어쩐지 쑥스러워하더니 외출하는 까닭을 설명했다.“오늘이 딸들 아버지 49재 날이라서 무덤에 가려고 하던 참이야. 당신, 49재가 뭔지 알지?”“알다마다요. 전 남편이 오늘까지는 지상에 머무르다가 내일이면 천국으로 떠나겠네요?”“전 남편이라기보다는 애들 아빠지. 밤새 무덤에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잠 한숨도 못 잤어. 그런데 떨어져 사는 딸들이 꼭 가봐야 한다고 강요하니 어쩔 수 없이 무덤에 꽃이라도 두고 오려고 해.”그녀는 기독교 신자라서 49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지만, 20여 년 전에 바람피우다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그 여자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

미국 생활 2024.06.09

차 좀 잘 만들지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차를 폐차하고 나서 새 차를 알아보며 한국산 차도 알아보려다가 바로 그 생각을 지운 건 그 얼마 전에 본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다. H 자동차의 검사원이 발로 차 문을 닫는 장면과 유튜브를 시청하며 건성으로 작업하는 듯한 작업자의 모습이 그 회사 자동차에 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깊이 심어준 것이었다. 보증기간이 제아무리 길다고 해도 소비자들은 고장이 안 날 차에 끌린다. 자동차를 소홀히 다루는 회사의 차에 호감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 미국인 직원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해 보니 그들은 근무 시간에 개인적인 볼일을 보거나 업무와 상관없는 잡담을 나누며 딴짓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근무 중에 유튜브 시청이라? 상상이 되지도 않지만, 미국 직장에서는 그런 직원은 즉시 해고당할 것이..

이것저것 2024.06.07

미국 은행원

며칠 전 온라인으로 은행 잔고를 확인하는 데 오래전에 발행한 수표가 입금된 게 보였다. 번호도 오래전 것이고, 수취인 성명도 없고, 수표 영상도 볼 수 없었다. 금액이 많지는 않았지만, 혹시 사기꾼의 짓이 아닌지 부쩍 의심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기꾼이 큰 금액의 돈을 빼 가서 해결하느라 고생깨나 했다는 지인의 얘기가 생각나며 불안해졌다. 은행에 연락하여 확인해 보니 거의 4년 전에 친척에게 축하 선물로 준 수표였다. 선물로 받은 수표를 인제야 입금한 그 친척도 어지간하지만, 180일 넘은 수표는 무효로 간주해야 하는데 4년이나 된 수표를 입금 처리한 은행도 멍청하다.오래전 직장에 다닐 때 부하 직원이 내 사인을 받기 위해 책상에 둔 400여 장의 수표를 바빠서 미처 사인하지 않은..

미국 생활 2024.06.01

이웃 할머니 돕기

아내가 산책에서 돌아와서, 오는 길에 이웃에 혼자 사는 중국인 할머니(85세)를 만났더니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답답해하더라고 했다. 종일 유튜브 시청하는 걸로 소일거리 삼는 분인데 내가 도와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체육관에서 다녀와서 그 할머니 댁을 찾아보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까마득하게 높고 경사가 급해서 나같이 의족 끼고 지내는 사람이 오르려니 정신이 아득했다.계단을 올라 식탁에 앉으니,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내놓으며 모두 유튜브가 안 된다고 했다. 침실에 있는 노트북도 안되고. 아니 고령의 할머니가 왜 이리 전자 기기기 이리 많담. 몇 가지 물어보았더니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유튜브 시청 말고는 이메일조차 사용할 줄 모른다니 그럴 수밖에.그래도 몽땅 유튜브가 안 나온다니 이건 분명히 인..

미국 생활 2024.05.31

가는 세월

오늘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몇 달 전에 통성명한 스티브(내 영어 이름과 같다)라는 영감이 앉기에 “오랜만이요”라고 인사했더니, 그가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라고 물었다. “스티브요.” 그랬더니 그가 “내 이름은…”이라기에 내가 얼른 가로채 말했다. “스티브 아니오? 나와 이름이 같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더니 그가 조금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우리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소?”라기에 그랬다고 했더니, “이런, 내가 이렇게 헤매는 걸 마누라가 몰라야 할 텐데. 이젠 기억력이 떨어져서…”   사실을 말하면 통성명한 후에도 여러 차례 가벼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는 기억을 잘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도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은근히 걱정하고 있는데, 나보다 나이가 적어 보이..

이것저것 202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