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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체험을 믿습니까

체육관에서 자주 보는 한국인 Mr. Oh는 나보다 세 살 적은 나이인데, 10대에 이민 온 탓에 한국말이 조금 서툴러서 잘 알지 못하는 단어나 표현을 들으면 바로 미간에 내 천자를 그으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서 나를 보아도 대개 눈인사 정도만 하고 긴 대화는 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어저께 내게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요즘 임사 체험(Near Death Experience)에 관한 책을 읽다가 궁금증이 생겨서 묻는다며 내가 교통사고 후 의식을 잃었던 동안에 겪은 체험을 자세히 얘기해 주면 고맙겠고, 말하기가 꺼려지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임사체험이라? 사고 후 두 달 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특별한 체험이란 없었기에 달리 해 줄 만한 말이 없었다. 몇 가지 꿈을 꾸기는 했지만, 임사체험과는 ..

신앙 생활 2023.07.03

난청유감

캐나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며칠 후 체육관에 갔더니 오랜만에 만난 마이크(Michael) 영감이 반겨준다. 나보다 열 살 정도는 많아 보이는데, 나이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여느 미국 영감들처럼 나를 늘 ‘Steve, my friend’라 부른다. 친근하게 대해주니 기분은 좋은데 영감님의 귀가 지독하게 나빠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때로는 괴롭다. 그: “오랜만이야. 무슨 일이 있었어?” 나: “캐나다 여행 갔다 오느라고 열흘 정도 체육관에 못 나왔어요.” 그: “뭐라고? 넘어졌다고?” 그는 보청기를 낀 귀를 아예 내 입에 바짝 갖다 대고 들으려고 애쓴다. 나: “아니요. 여행 다녀왔다고요?” 그: “다친 데는 없다고?” 나: “여행 다녀왔다니까요.” 그: “병원에는 가 봤어?” 나: “아니요, 다친..

미국 생활 2023.07.02

Life is good

늦잠에서 깨어나 전화기에 뜬 날짜를 보니 오늘이 6월 27일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생각해 보니 바로 18년 전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날이다. 사고 두 달 후에 의식을 되찾고 매일 아침을 맞을 때마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루하루가 쌓여서 18년이나 더 살았으니 참 오래 산 셈이다. 먼저 이 나이 되도록 먹고 살게 해 주시고, 건강 주신 하느님과 긴 세월 고통을 함께 한 가족과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은인들께 감사드린다. 돌이켜 보니 산다는 게 참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살아보니 산다는 건 좋은 거다. “Life is good. Do you know what I mean?”

교통사고 이후 2023.07.01

이웃 할머니의 내로남불

내로남불이라는 용어가 위키백과 사전에 표제어 Naeronambul로 등재된 걸 보니 이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듯하다. 이 사전에서는 이 용어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내로남불이라는 한국말은 ‘이중 잣대’를 가리키는 건데,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표현을 줄인 것으로서 주로 정치적으로 상대편을 비판할 때 사용된다. 이 용어는 나와 상대방을 이중 기준으로 비판히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로맨스란 지극히 정상적이고 개인적인 남녀관계로 생각되고, 불륜이란 가정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은밀한 관계를 갖는 걸 비난하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 기준을 낮게 잡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 기준을 높게 잡아 엄격하게 비판하는 걸 이른다. 이와 같은..

미국 생활 2023.06.20

치과병원을 다녀와서

스케일링을 받으러 반년 만에 치과병원을 찾았다. 이 나이 되도록 충치나 잇몸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지만, 몇 년 전에 단단한 음식을 씹다가 이가 깨진 적은 두어 번 있다.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니 다행이다. 내 단골 치과의사는 한국인인데, 스케일링 정도는 미국인 여성 조수들이 갈 때마다 번갈아 가며 처리해 주고, 의사는 작업이 다 끝난 후 잠깐 들어와서 입안을 대강 훑어보고는 나이에 비해 치아가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깨어진 이빨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뽑으라고 매번 권한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은 별문제 없으니 갈 데까지 가보겠다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돈이 아깝고, 뽑은 후에 있을 후유증이 걱정되기 때문에 그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이다. 과묵한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내지만, ..

가족 이야기 2023.06.11

‘잃어버린 왕국’을 읽고 나서

1988년에 출간된 최인호의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을 이제서야 읽었다. 백제의 멸망 과정을 읽으려니 안타깝기도 하고, 나이 들며 떨어진 기억력 탓에 읽다 보면 앞서 읽은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흐름이 자주 끊겨서 몇 달에 걸쳐서 겨우 다 읽고 나니 최인호의 천재성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일본의 역사 왜곡과 백제의 역사를 파헤치고 있다. 작가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폭로하기 위해 수백 권의 일본 서적을 읽고, 일본 각 지방을 답사했다. 이 소설은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변조, 칠지도(七支刀) 명문의 견강부회식 해석, 과장과 오류투성이인 일본서기 등을 중심으로 고대의 역사를 하나씩 풀어가며 백제와 왜(일본) 간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역사 왜곡에 관하여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것저것 2023.05.28

하늘이 부르실 때

100세 장수 시대라고는 하나 남녀 평균 수명이 90세가 넘는 나라는 없으니 장수 국가로 손꼽히는 나라의 국민도 대개 80대에 세상을 떠난다고 봐야 한다. 남자의 평균 수명만 놓고 보면 이들 국가의 남자들은 대개 80세를 전후하여 세상을 떠난다고 하며, 건강 수명만 보면 70대 중반 이후에는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침 산책을 나서다가 옆집에 사는 잭(Jack)을 만났다. 늘 그렇듯이 우는 듯 웃는 듯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짓는 미소, 느릿느릿 걷는 발걸음이 측은해 보인다. 일주일에 세 번 받는다는 신장 투석을 받으러 병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매번 네 시간씩 걸린다는 그 과정이 얼마나 지겨울까? 일흔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신장을 이식받는 건 생각하기 어려울 테니 하늘이 부를..

미국 생활 2023.05.25

승객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아기 엄마의 마음

며칠 전에 Dasha Taran이라는 분이 Quora Digest에 올린 글을 옮깁니다.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비행시간은 열 시간 조금 더 된다. 아래 사진의 아이 엄마는 200명이 넘는 승객 모두에게 플라스틱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 봉지 안에는 과자와 껌과 귀마개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그녀의 넉 달 된 아기가 비행 중 시끄럽게 굴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미안한 마음을 표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봉지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쪽지도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장우입니다. 저는 태어난 지 넉 달 되었고요, 오늘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가고 있답니다. 저는 조금 긴장되어 있고 좀 두려워요. 이번이 제가 태어나고 처음 하는 비행기 여행이거든요. 제가 울거나 소란을 ..

이것저것 2023.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