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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아침에 연어를 생각하다

가끔은 바닷가에 있는 생선 가게에서 연어를 사 와서 손질한다. 커다란 연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늘을 벗기고, 뼈와 살을 분리하고, 껍질을 벗겨내고, 도막 쳐서 소금을 뿌린 다음, 냉장고에 30분 정도 두었다가 꺼내어 씻어 내고 물기를 닦은 다음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 먹는 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요즈음은 그것도 귀찮아서 코스트코에서 껍질과 뼈를 발라낸 노르웨이산 연어를 사 와서 손질해 먹으니 훨씬 더 편하다. 생선 가게에서는 물어볼 때마다 갓 잡아 온 자연산 연어라고 하기는 하는데, 신선도가 떨어져 냉동했던 걸 해동해서 파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하는 연어와는 달리 ‘양식 연어, 냉동한 적 없음, 오늘 아침에 손질 후 포장됨’이란 표시가 더 믿을만해서 요즈음은 코..

이것저것 2024.01.20

이타카로 가는 길

작년 6월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인 호숫가에서 가족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나니 이참에 자동차를 몰아서 왕복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을 전담할 아내의 체력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편도로 600마일(960km) 정도라 하루에 너덧 시간 정도, 그것도 두어 시간마다 쉬면서 운전하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비행기 탑승 대신 자동차 운전을 선택했다. 우리가 사는 뉴저지주에서 떠나 펜실베니아주를 지나 뉴욕주를 거쳐서 캐나다로 가는 코스인데 지도를 보고 뉴욕주 북부에서 이타카를 지나는 도로와 시라큐스를 지나는 도로 중에서 별로 망설이지 않고 이타카를 지나는 도로를 선택했다. 아마도 내 기억 속에 오디세우스(라틴어로는 율리시즈)가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미국 생활 2024.01.15

말보로라는 마을

몇 년 전 뉴저지 주택국을 통해 은퇴 후에 살 집을 알아보고 있던 어느 날 말보로(Marlboro)에 적당한 집이 나왔으니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말보로? 그 동네가 뉴저지주 중부 지역 어디에 있는 것 같은데…..지도로 찾아보니 한인 타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범죄율이 낮고, 공기가 맑고 게다가 바다도 가까운 게 주거 환경으로 나무랄 데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뉴저지주 동북부 지역에 살던 나는 뉴저지 중부 지역에 있은 작은 마을인 말보로(Marlboro)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오래전 그 동네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소문(교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함)을 얼핏 듣고는 말보로 담배가 연상되어 담배 농장과 담배 생산 공장이 그 마을에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미국 생활 2023.12.13

우리 응가 출세했네

정기 검진받으러 오라는 주치의의 연락을 받고 닥터 오피스를 방문했다. 나이 여든이 가까운 분이라서 방문하는 환자는 적고 시간이 남아돌아서인지 방문할 때마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많고 잔소리도 많이 하지만, 우리 부부의 건강을 챙기느라 그러려니 하고 고맙게 받아들인다. 삐쩍 말라서 한 방울도 아쉬운 내 몸에서 뽑는 피가 아깝기도 하고, 소변 받기가 귀찮아도 군소리 없이 주치의가 시키는 대로 따르지만, 검사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게 문제다. 접수를 담당하는 미국인 직원에게 물어보면 직접 와서 받아 가라고 무뚝뚝하게 말하고, 의사에게 직접 전화하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 문제 없으니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 거라며 짜증스러워한다. 그래서 한인 환자들이 하나둘씩 발걸음을 끊는다고 들었다. 그래도 오랜 경험에서 ..

미국 생활 2023.11.25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의 대화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에 들어섰습니다. 하오나, 우리 모두 언제나 봄과 여름을 느끼며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리오며, 우리가 이렇게 함께 식사하는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리옵나이다.” 며칠 전 이웃 동네에 사는 (은퇴한) 이 목사님 내외분과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하며 그분이 바치는 기도를 들으며 울컥했다. 그분의 기도는 늘 은혜롭고 만날 때의 상황에 맞는 기도라서 마음에 와닿기도 하지만, 비교적 짧아서 더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것 같다. 특히 그가 암 투병 중이라서 그런지 그날의 기도는 더 절절한 것 같았다. 그분은 키모세라피(화학 치료)를 받는 중이라서 빠진 머리칼을 가리려고 모자를 쓰고, 목소리가 꽉 잠겨 있긴 했지만, 건강이 좋..

신앙 생활 2023.11.22

바쁘다 바빠

외손자들과 외손녀들이 모두 멀리 떨어져 살기에 직접 만나는 건 몇 년에 한 번 정도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영상 통화로 그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데 열 살 넘은 아이들은 진작부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외계인으로 생각하는지 영상에 모시기가 어려워서 네 살 된 막내 외손녀가 단골로 화면에 등장한다. 며칠 전 주말에 큰딸과 함께 막내 외손녀가 잠깐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가 했더니, “Mommy, I am busy.”라는 말을 남기고는 바로 사라졌다. 이제는 그 아이에게도 외계인 취급을 받는가 싶었다, 네 살짜리 아이가 바빠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이 없다는 게 우스워서 크게 웃었더니, 큰딸이 그 아이가 오후에 생일 파티와 친구 집 방문으로, 제 가방에 장난감과 몇 가지 소지품을 챙기느라..

이것저것 2023.11.11

자녀 교육에 정답이 있을까?

나에게 ‘H 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라는 작품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꼽으라면 나는 아래의 글을 고르겠다. 좀 길지만, 거의 원문 전부를 번역해서 소개한다. [내가 다칠 때마다, 엄마는 소리부터 질렀다.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이 다쳤을 때, 백인인 그들의 엄마는 몸을 숙여서 아이가 괜찮은지 물어보고, 문제가 있으면 바로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러나 내가 다치면 엄마는 마치 내가 악의를 갖고 자기 물건을 망가뜨렸다는 듯이 화부터 냈다. 언젠가 내가 집 뜰에 있는 나무를 오르다가 떨어졌는데, 드러난 배는 거친 나무껍질에 긁혀 버렸다. 발목이 꺾이고, 셔츠는 찢어지고, 배 양쪽이 긁혀서 피가 나서 우는데도 내가 엄마의 품에 안겨서 병원에 가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이것저것 2023.10.09

“H 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

“H 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 Mart)” 이 책은 작가가 이전에 같은 제목으로 쓴 수필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수필에서 작가인 미셸 조너(Michelle Zauner, 이하 미셸로 표기)는 H 마트에서 한국 요리를 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사는 얘기를 한다. 미셸은 딸에게 엄격했으나 사랑이 깊었던 어머니 정미를 회상한다. 미셸은 자신이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자주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반항했다고 쓰고 있다. 모녀는 2년마다 가족을 방문하러 서울로 여행했다. 미셸이 열네 살일 때,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생일 적에 미셸은 우울증에 빠지고, 무단결석을 자주 하게 되자, 정미는 딸이 일주일에 한 번은 가장 친한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도록 허락하는데, 미셸이 친구의 어머니를 존경하기 시작..

번역문 2023.10.07

청설모와 맞짱을 뜨고 나서

우리 집 주위에서 청설모는 가장 흔히 눈에 띄는 동물이다. 가을이 깊어져 가니 창문을 열면 땅을 파고 도토리를 숨기는 청설모를 거의 언제나 볼 수 있다. 청설모가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이리로 몇 걸음 저리로 몇 걸음, 마치 경주라도 하듯이 빨리 내달리지만, 몇 걸음 가다가 바로 멈추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재주 넘기를 하는 걸 보면 보이지 않는 관중을 의식하는 것 같아서 이놈은 자신을 인기 있는 댄서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날개가 없는데도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를 타고 거침없이 오르내리거나 나무에서 나무로 재빨리 이동할 때는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청설모를 악마와 연관 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청설모를 요괴로 여기기도 했고, 서..

미국 생활 2023.09.26

이웃 영감에게 애국심이란

노동절(9월의 첫 월요일) 아침 산책길에서 지그(Zyg) 영감을 만났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배라서 만나면 두어 마디 농담도 편안하게 나누곤 한다. “오늘은 휴일이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하기야 우리에게는 365일이 휴일이지.” “오늘 무척 더울 거라던데, 시원하게 지내소.” 돌아서며 생각하니 오늘 그가 내게 거수경례하는 걸 잊었다. 아침에 만나면 으레 왼손으로 경례를 붙이기에 오른손에 문제가 있나 보다 했는데 나중에 화단을 손질할 때 보니 멀쩡했다. 애국심을 표할 때는 오른손으로 경례하고, 나 같은 사람에게 친근감을 표할 때는 왼손으로 경례하는, 나름대로 지키는 원칙이 있는 듯하다. 그는 자그마한 화단 가꾸기로 소일하는데, 좁고 길쭉한 화단을 따라가며 열 개도 넘는 작은 성조기를 세워 놓..

미국 생활 202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