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42

어린 왕자

초등학교 2학년 때(1956년)였다. 아침마다 배달되던 조선일보를 받으면 얼른 어린이를 위해 제작된 지면을 읽다가 신문을 기다리던 아버지에게 야단맞곤 했다. “애들이 신문에서 뭐 볼 게 있다고 붙들고 있느냐?”라고. 한글을 깨우치고는 활자로 된 건 무엇이든 읽는 재미에 빠진 내가 아버지 눈치를 보며 신문을 받으면 제일 먼저 보던 게 당시 연재되던 ‘어린 왕자’였다. 뭔가 신기한 이야기로만 생각되었지, 내용을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 본격적인 독서는 ‘어린 왕자’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때 신문에서 읽은 ‘어린 왕자’의 저자가 누구인지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해도 제목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게 그 유명한 생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며칠..

이것저것 2022.09.06

아무에게나 그 아름다움에 눈길을 주지 말고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임제(林悌)의 시조가 생각난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지은이는 당대의 대문장가로서 명산을 두루 찾던 풍류인이었다. 이 시조는 지은이가 평안도 평사(評事: 정6품의 외직 무관)로 부임 도중 개성에 들러 황진이의 무덤에 술잔을 부으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으로 전해 온다. 이 일이 양반의 체통을 떨어뜨렸다고 논란이 되어 임제는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그런 것에 개의하지 않고 명산을 찾아 다니며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녀 간의 사건 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 2022.09.05

복장 규정(Dress Code)

젊은 여성 국회의원이 밝은색 원피스를 입고 등원한 걸 놓고 몇 날 며칠을 떠들어내는 걸 보니 ‘참 할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의원들까지도 ‘국회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며 비난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국회의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진 게 언제인데 고작 여성의원의 옷차림을 두고 권위 실추를 논하다니. 그 여성 의원이 입었던 옷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정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단정해서 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고 성적인 매력을 강조해서 남성 의원들의 마음을 흔들만한 복장도 아니었다. 정장을 입지 않더라도 일이나 제대로 한다면 나는 그런 정도의 복장이 비난받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왕이면 원피스보다는 정장을 입으면 낫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꼰대라서 그럴까? 며칠 전에 이스라엘 필..

이것저것 2022.09.04

방구석 유목민

지난겨울 언젠가 밤새 눈 내린 다음 날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지금 온 세상은 음울하고 길은 눈으로 덮여있네”라는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의 가사가 떠올랐다. 언론에서는 매일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하니 외출도 최대한 자제하며 지내던 차에 연일 눈까지 내리니 참 답답했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몽골 이야기’라는 걸 보게 되었다. 한 개, 두 개 보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끌려서 수십 개를 찾아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몽골 바람에서 길을 찾다’라는 책까지 사서 열심히 읽으며 답답함을 달랬다. 유목(nomadism)은 가축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이가 될 풀밭을 찾으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 활동을 말한다. 유목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장소에..

이것저것 2022.09.04

멕시코에서 본 긴 꼬리 찌르레기

지난 해 말에 휴가를 보낸 멕시코 캔쿤(Cancun)은 일 년 내내 기온이 높고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 열대성 기후대에 속한 지역이라서 그런지 내가 묵었던 리조트에는 아예 문이 없이 앞뒤로 뚫렸거나, 문이 있어도 늘 열어 둔 건물이 많았다. 그런 건물 안팎으로 날 짐승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사람 구경하기에 바빴다. 거기에서 제일 흔히 본 새가 까마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집은 훨씬 작은, 긴 꼬리 찌르레기(Great-tailed Grackle )였다. 꼬리의 길이가 몸 전체 길이의 절반 정도이고 온몸이 새카맣고 눈매까지 불량스러워서 예쁜 구석이 전혀 없는 놈이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영장 가에서 우리 일행이 고스톱을 치고 있으면 바로 옆에 앉아서 개평을 뜯으려 들었고, 로비나 바에서..

이것저것 2022.09.04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몇 달 전에 어떤 고등학교 동창생이 동창 웹사이트에 ‘줄여서 보는 로마인 이야기’라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친구가 할 일은 없고 시간이 남아 돌아가니 이런 글을 올리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그가 올린 글을 훑어보았다. 처음 두어 회를 읽어 보니 결코 심심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 내용이 충실했고, 짜임새가 있었으며, 나름대로 확고한 역사관이 드러나 있었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글이 전문 역사학자가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PDF로 보관하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열다섯 권 중 처음 두 권만 읽고 말았던지라 그의 요약본이 반가웠다. 나이 드니 장시간 머리를 숙이기도, 책을 들고 활자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힘들어서 한 권이라면 몰라도 열다섯 권씩..

이것저것 2022.09.03

독창성에 관하여

고 박창득 몬시뇰은 50년 사제 생활의 대부분을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목하며 보냈다. 오래 전 그분의 50년 사제 생활을 축하하기 위한 금경축 행사를 준비하며 그분이 쓴 글을 모아서 세 권 정도의 문집을 발행하려는 모임을 여러 차례 가졌다. 수많은 강론 기록과 가톨릭 다이제스트 등의 책에 실린 글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기에 그만한 분량의 글을 모으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꾸밈없는 그분의 글을 좋아하는 신자들도 많았기에 그 작업에 별다른 난관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분의 반대에 부딪혀서 문집 발행이 무산되었다. 반대 이유가 이러했다. “내가 많은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 글들은 성경이나 다른 훌륭한 분들의 좋은 글이나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이므로 나의 독창적인 글이라 볼 수가 없고, 이미 다..

이것저것 2022.09.03

대한민국에서 지금 아이를 낳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를 보다가 ‘대한민국에서 지금 아이를 낳는 사람은 바보입니다’라는 내용이 좋기에 아래와 같이 요약해서 소개한다. “대한민국에서 지금 아이를 낳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아무 계획 없이 아이를 낳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지요. 저출산 현상을 진화적 적응이라는 면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아이를 기를 능력이 될지, 아이 양육을 위해 주변 환경이 얼마나 받쳐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애를 낳으면 잘 키워낼 수 있을까? 고민이 되고 그게 계산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도 과감히 출산하는 사람은 정말 애국자인 거지요. 하지만 생각 없이 애를 낳는 건 현명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이나 출산에 앞서 돈 계산이 앞서지요. 하지만 ..

이것저것 2022.09.03

노인과 바다를 읽고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깨었다. 깨기 직전에 무슨 꿈을 꾸긴 꾸었는데 생각나지 않으니 분명히 개꿈이었을 거다. 나이 드니 새벽에 잠에서 깨면 다시 잠을 이루기 어렵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서 며칠 전부터 사전을 찾아가며 읽고 있는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노인과 바다’를 펼친다. 젊었을 적에 읽어 보았지만, 같은 작품도 나이 들어서 다시 읽으니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노인들은 왜 일찍 깰까? 더욱더 긴 하루를 보내려고 그러는 걸까?” 노인과 바다에서 새벽에 잠이 깬 주인공이 던지는 질문이지만, 나도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나오는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를 번역해서 인용해 본다. “주인공인 쿠바인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이것저것 2022.09.03

나는 꼰대일까

체육관에서 자주 만나는 프랭크 할아버지는 지팡이 한 개를 짚고 느릿느릿 걷는 모습으로 보아 8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만날 때마다 나는 그를 그냥 ‘프랭크’라고 부르고 그는 나를 보면 ‘Hello, Buddy(친구)’라 부르며(내 이름을 잊은 것 같다) 인사한다.낯 익은 미국인과 인사할 때는 특별한 경칭 없이 대개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나를 그냥 내 미국식 이름인 ‘Steve’라고 부르고 친숙하지 않은 이가 격식을 차린다며 ‘Mr. Kim’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그럴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나이에 따라 표현을 조금씩 달리하는 우리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나이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존댓말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미국인들의 인간 관계는 우리보다는 편하고 유연한 것 같다. 그래서..

이것저것 2022.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