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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

2005년 말 교통사고로 6개월간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하기 며칠 전 신경외과 의사가 절단되지는 않았지만, 망가져 신경이 온통 손상되어 발을 올릴 수도 없는 오른쪽 다리를 꼼꼼히 검사하고 나서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은, 손상된 신경이 많이 손상되어 거의 평생 브레이스(발받침기)를 착용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손상된 신경이 천천히 자라고 있습니다. 정상으로 회복되는 데는 30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내 나이가 57세였다. 아흔이 다 되어 신경이 복구된들 그 나이에 운전을 할 건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리고 19년이 흘렀지만, 회복될 거라는 신경은 감감무소식이다. 여전히 오른쪽 다리는 감각이 없고, 브레이스를 착용하지 않으면 걷기도 힘든다. 운전은 언감생심이..

교통사고 이후 2024.05.14

나이 들어서 혼자 살기

늘 코에 휴대용 산소 공급기의 파이프를 꽂고 다니는 이웃집 조앤(Joanne) 할머니의 둘째 아들 조(Joseph)가 앞뜰에 꽃을 심다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니날이라고 방문하며 사 들고 온 꽃을 뜰에 심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암으로 몇 년째 투병 중인데, 2년 전에 바닷가에서 낚시하다가 우연히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나눌 때보다는 안색이 아주 좋아 보이길래 병세가 진전이 있었는지 물어보자, 손을 파도치듯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호전되었다가, 악화하였다가…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뭐.”라며 달관한 듯이 씨익 웃었다.  재작년 독립기념일에 바닷가에 가서 생선 튀김을 사 먹고 낚시터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웬 삐쩍 마른 사내가 나를 보더니 스티브 아니냐고 묻기에 “동네 안팎을 가..

미국 생활 2024.05.13

삼인성호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반이었던 J와 단톡방에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충북 음성 촌놈인 그는 어렸을 때 키가 껑충하게 크고, 늘 얼굴을 찌푸리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경찰서장 출신에, 박사학위 소지자, 그리고 대학교 교수까지. 이 정도면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힐 만하다. 그런 그가 평범하게 살아온, 강원도 삼척 촌놈인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몇 번인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자네가 기억나지 않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미국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목사라던데 사실인가?”라기에 “목사 친구를 몇 명 둔 건 사실이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다.”라는 말로 답했지만, 어쩌다 나를 유명한 목사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다 있을까?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다른 직업도 아닌 목사로 잘못 알고 있다..

이것저것 2024.05.10

우물에서 숭늉 찾기

우물에서 숭늉을 찾았다는 전설 속 인물이 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맥주를 원샷으로 마시기 시작한 시조가 내가 아닐까 싶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직장에 다닐 때 계산기를 찾다가 눈에 띄지 않자, 얼결에 탁상전화기의 자판을 두드린 게 다른 직원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상사의 지시는 물론 벼락같이 해치웠지만, 칭찬은 별로 듣지 못 했다. 오히려 경솔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나 모르겠다. 나는 일을 잘 했지만(그냥 웃으세요) 상관이란 워낙 칭찬에 인색한 인종이니까.부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한 다음 바로 다 끝냈느냐고 묻는 일이 자주 있어서 사람을 들볶는다고 원성을 듣기도 했다. 부하라는 인간들은 왜 하나 같이 느려터졌고, 무능하냐고 푸념했다.이게 모두 내 지랄같이 급한 성질 탓이다.사흘..

이것저것 2024.05.07

쟈니와 빌

오전이고 오후고 언제나 집 둘레길에서 눈에 띄는 호리호리한 동양인이 있다.깔끔한 외모에 무표정한 얼굴, 남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옷차림이라서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던 그를 본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저께 처음으로 서로 통성명을 했다. 어쩌다 딱 맞닥뜨리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쟈니라고 합니다. 중국 태생의 은퇴 목사로서, 나이는 69세입니다. 아내의 이름은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당신 아내의 이름은 데레사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억양 없이 숨 가쁘게 말을 쏟아내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니. “서부 영화 Johnny Guitar에 나오는 주인공 쟈..

미국 생활 2024.05.05

젊은이들의 도전 정신

며칠 전에 만난 주치의의 지시에 따라 밤중에 자주 쥐가 나는 다리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물리치료사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다가 한마디 던졌다. “I used to be a good boy. Now I am a good old man.”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고 지낸 지나간 시절이 후회스러웠다. 고분고분 어른 말을 잘 듣는 게 모범생이라고 생각해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치를 보며 당당하게 내 의견을 표현하지 못 하고 다소곳이 듣기만 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모범생이라는 단어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지만, 융통성이 없고, 잘난 체하고, 깐깐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모범생을 지칭할 때..

이것저것 2024.04.29

미국의 동네 의사

의사 중에서도 제일 자주 만나는 의사는 아무래도 동네 내과의사다.수많은 의사를 만나보니 세상에 요즘같이 첨단 장비로 증세를 잡아내는 시대에 특별히 용한 의사란 없고 진료 경험이 많아서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환자가 불안하지 않게 잘 설명해 주는 의사가 유능한 의사로 생각된다. 의사가 비교적 많고, 노인과 빈곤층에 대한 의료 제도가 잘 갖춰져 있는 미국에서는 병원 문턱이 그리 높지 않고, 의사들도 매우 친절하다. 중환자 말고는 용한 의사를 만나러 대학병원을 찾아 장시간 대기하는 미련한 환자는 별로 없고 대개는 편한 마음으로 동네 의사를 만난다. 의사가 불친절하거나, 성의가 없는데도 그 의사를 계속 만날 필요는 없으니, 개업의들도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내과 의사들의 진료 시간은 대개 한 시간..

미국 생활 2024.04.26

잭과 록산느 부부

옆집 잭과 록산느 부부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콘도미니엄으로 이사 왔으니 서로 알게 된 지 6년 차가 되었다.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라서 친근감이 느껴져 만나면 가벼운 인사도 나누고 소피라는 이름의 늙은 개에게도 관심을 표하고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소피는 늙고 병들어서 세상을 떠나 매기라는 이름의 어린 개를 새로 입양했다. 잭도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더니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 투석을 받으러 병원으로 행차한다. 아직은 힘겹게 운전하기는 하지만, 휠체어와 워커를 번갈아 사용하며 걷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럽다. 아침마다 대개는 록산느가 목줄을 잡고 어린 개를 산책시키는데, 언젠가부터는 록산느도 지팡이나 워커를 짚고 힘겹게 걷기에 물어보니 양쪽 무릎이 아파서 걷는 게 힘들다고 한다. 부부가 모두 건..

미국 생활 2024.04.21

4월이 오면

4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April의 어원은 ‘열린다(open)’는 라틴어 동사 aperire로서,나무나 꽃이 열려서 움트고 피는 계절을 암시한다고 한다. 현대 그리스어에서 봄이라는 단어가 열림이라는 뜻을 가진 Anoixis인 것과 비슷한데 라틴어든 영어든 열린다는 단어와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느낌은 참 비슷하다. 달력으로는 한겨울인 1월에 한 해가 시작되지만, 계절로 볼 때는 4월이 한 해를 열어 주는 것 같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April come she will”의 가사는월별 날씨가 뉴저지 날씨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노래하는 것 같다. 4월이오면 그녀도 오겠지. 봄비로개울물이 넘치면. 5월이오면 내 곁에 머물러 다시 내품 안에서 쉴 테지. 6월이오면 태도를 바꾸어 불안..

미국 생활 2024.04.16

“매기의 추억”("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에 얽힌 사연

‘매기의 추억’이라는 노래의 작사자인 조지 워싱턴 존슨과 주인공 매기 클라크는 고등학교 교사와 제자로 만난 지 몇 년 후 결혼했지만, 불행하게도 노래의 가사와는 달리 그들은 함께 나이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매기의 폐결핵이 더는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1865년 월에 결혼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에, 조지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살던 옛 친구, J. C. 버터필드를 찾아가서 그의 작품, “매기의 추억”을 음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조지는 1917년에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세상을 떠났는데, 매기가 죽은 지 반세기 이상이 지난 때였다. 매기가 당시에는 불치병인 폐결핵에 걸린 줄 알면서도 매기와 결혼한 후, 가망 없는 투병을 하며..

이것저것 2024.04.13